충남 태안에서 유학자 아들로

김삼웅 2023. 8. 17. 16:0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이종일은 1858년 11월 6일 아버지 이교환(李敎煥)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교환은 향리의 유학자로서 지방에서 고사(高士)로 칭송되었다고 한다.

이종일의 호는 옥파(沃坡), 도호(道號)는 묵암(黙菴)이고, 필명은 중고산인(中皐散人) 또는 중헌(中軒) 등이 있다.

이 사실과 이종일의 선대가 태안(泰安)에 정착한 것이 당쟁(黨爭)과 일정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잊혀진 선각자, 묵암 이종일 평전 2]

[김삼웅 기자]

 묵암 이종일 선생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이종일은 1858년 11월 6일 아버지 이교환(李敎煥)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충남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이다. 본관은 성주이고 시조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20세손 이순유(李純由)이다.

아버지 이교환은 향리의 유학자로서 지방에서 고사(高士)로 칭송되었다고 한다.

이종일의 호는 옥파(沃坡), 도호(道號)는 묵암(黙菴)이고, 필명은 중고산인(中皐散人) 또는 중헌(中軒) 등이 있다. 또 다른 도호로 천연자(天然子)로 쓰이기도 했다.

그의 가계는 고려말의 권문세족으로 조선전기까지 누대에 걸쳐 관직을 역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 제6대 육진(陸津, 1680~?)부터는 관직을 지낸 사람이 없어 한미한 가문으로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과 이종일의 선대가 태안(泰安)에 정착한 것이 당쟁(黨爭)과 일정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한편 그의 5대 석주(碩周)와 7대 시상(始祥)은 양자로서 대를 이었으며, 이종일의 아들로 입적된 학순(學淳)도 생부(生父)는 이종일의 동생인 종칠(鍾七)이다. (주석 3)

그는 참으로 불운한 시대에 태어났다. 격동기이고 난세였다. 1862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고종이 즉위했다. 동학교조 최제우가 대구에서 사형되었다. 경기·충청·황해에서 화적이 성행했다.(1864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나고(1866년), 전국에 유행병이 창궐했으며(1867년), 정덕기가 『정감론』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키고(1868년), 전라도 광양현과 경상도 고성현에서 민란(1809년), 청나라의 도적 무리가 평안도 벽동에 와서 약탈하고(1870년), 대원군 사액서원 47처만 남기고 전국 서원을 철폐하고, 신미양요가 일어났다.(1871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시작되고(1873년), 운야호사건과 울산민란이 일어났으며,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가 체결되었다.(1876년)

이상 약술한대로 이종일이 어릴적 조선에서 벌어진 비교적 큰 사태와 사건들이다.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격변기에 무명의 시골 소년에 대한 기록이 있었을 리 없다. 직접 쓴 『묵암 비망록』도 40세인 1898년부터 기록하였다. 성년 이후의 기록으로 보아, 그는 어려서부터 무척 총명하고 글을 좋아했으며 아버지의 가르침과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중심으로 글공부를 하였을 것이다.

그는 언론을 비롯 오랫동안 사회활동을 하면서 수백 편의 글을 남겼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일상과 가족·주변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전통사회의 선비들 중에는 자신과 가족사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그의 성장기 및 초임 관료 시기는 외침과 민란이 거듭되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에도 반강제적인 문호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민심이 크게 요동쳤다. 여전히 사회주도층에서는 위정척사론을 내세우고, 약세이지만 근대적 개화주의자들도 등장하고 있었다. 일종의 이념적·사상적 과도기였다. 

주석
3> 박걸순,『이종일 생애와 민족운동』, 42쪽, 독립기념관, 1997.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