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앞에서 거짓말하다 쫓겨난 대통령

김성호 2023. 8. 1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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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25] <닥터 후> 뉴 시즌 6와 리처드 닉슨

[김성호 기자]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는 그의 업적이 아닌 과오 때문이다. 닉슨 행정부가 임기 동안 저지른 전방위적 도청행각은 이내 전 세계적 스캔들로 비화됐고, 그는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 위기를 겪으며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워터게이트라 불리는 이 사건 뒤 닉슨은 미국의 그리 길지 않은 역사에서 가장 실패했고 또 추한 정치인으로 기록되었다.

닉슨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영화 속에서도 자주 그려진다. 대개는 추악한 독재자로 그를 그리고는 하지만 몇몇 작품은 참담한 실패 너머에 서 있는 한 인간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하기도 한다. 올리버 스톤의 역작 <닉슨>이 그와 같은 흐름에서 가장 앞에 있는 작품으로, 영화에선 닉슨이 정적인 존 F. 케네디에게 열등감을 갖는 모습이 흥미롭게 다뤄지기도 한다.
 
▲ 닥터 후 포스터
ⓒ BBC
 
미국 최악의 대통령에게 이런 면이

그러고 보면 닉슨에겐 억울한 면이 분명히 있다. 그는 자수성가의 표본이라 할 만한 사람으로, 여유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노력을 거듭한 끝에 대통령에까지 오른 사나이이기 때문이다.

동 시대 민주당의 스타였고 먼저 대통령을 역임한 케네디는 마피아와 결탁한 가문의 자식으로, 그 스스로는 별다른 역량이 없으면서도 뒷배 덕택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고 화려한 정치행로를 걸어가지 않았던가.

반면 닉슨은 실력으로 같은 학교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진학하지 못했고, 대중적 인기 역시 따르지 않았다. 닉슨에게 저보다 늘 한 발 앞서 있는 듯 보였던 케네디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비겁하게 느껴졌을지 따로 듣지 않아도 알만하다 하겠다.
  
▲ 닥터 후 스틸컷
ⓒ BBC
 
세계로 진출한 영국 대표 드라마

<닥터 후> 여섯 번째 뉴 시즌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시리즈다. 영국을 대표하는 드라마답게 전 우주적 이야기임에도 주로 영국을 무대로 했던 이 드라마가 그 시작부터 미국, 그것도 백악관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때는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을 앞둔 1969년, 이제 막 집권한 닉슨의 재임 첫 해가 되겠다.

닉슨은 여섯 번째 뉴 시즌의 처음 두 회차에 등장하는데,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몇몇 사건을 통해 닥터(맷 스미스 분)와 그의 동반자들은 저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어떤 위협이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서 있음을 느낀다. 그들은 단서를 추적한 끝에 한 인물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의 정체는 퇴직한 CIA 요원이다. 그를 찾아 주인공들은 미국으로 타임머신을 몰아가니, 도착지가 바로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이 되겠다.

이런저런 사건을 거쳐 닉슨은 닥터에게 전적으로 협조하기로 결심한다. 닥터는 CIA와 협력해 마주하면 기억을 잊게 되는 외계종족이 아주 오랫동안 지구에 있었으며, 인간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이들의 조종을 받아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었단 걸 밝혀내기에 이른다. 마주하면 마주했다는 기억을 잊게 되는 이 황당한 능력에 대항하여 주인공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은밀한 싸움을 이어나간다.
 
▲ 닥터 후 스틸컷
ⓒ BBC
 
역사와 드라마가 맞닿는 순간

흥미로운 건 싸움 그 자체가 아니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외계인과의 싸움은 이 오래된 드라마가 반세기 넘도록 이어온 일이 아닌가. 이제는 당연해진 싸움보다 그 싸움을 둘러싼 여러 요소, 이를테면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며 사건, 화려한 볼거리와 설정이 이 드라마의 진정한 맛과 멋이 되고는 하는 것이다. 이 시리즈에선 바로 닉슨이 그 역할을 맡게 되고, 드라마는 기존의 흔한 미국 영화며 드라마와 달리 닉슨을 제법 리더십 있고 진솔한 인물로 그려낸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주범이자 위증을 거듭하다 지지층에게까지 외면 받은 추잡한 정치인, 그리하여 미국 역사에 영원히 새겨진 대통령이 바로 닉슨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다른 많은 정치인이 그러하듯 닉슨에게도 업적이라 할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또 그가 아주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치인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드러내기도 한다.

가장 흥미로운 건 닉슨이 도청에 이른 계기까지 이 드라마가 풀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만나면 기억할 수 없게 되는 존재와 싸우는 가운데 녹음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밖에 없다. 마침내 닥쳐온 위협을 물리친 닥터와 그 일행이지만 이들은 완전하며 영원한 승리는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닥터는 닉슨에게 적어도 대통령 집무실의 모든 소리는 녹음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게 되는 것이다. 도청으로 몰락하게 될 정치인에게 도청을 조언하는 장면이라니, 이 발칙하고 금기 없는 상상이야말로 <닥터 후>가 오래도록 인기를 얻는 비결이 아닐까.
 
▲ 닥터 후 스틸컷
ⓒ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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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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