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보이즈' 10년에 제 인생이 있어요"
[곽우신 기자]
▲ <히스토리 보이즈>가 좋은 이유 "결국은 '어떤 교육 시스템이 맞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해요. 사실 헥터의 교육도, 어윈의 교육도, 딱 '이거다'하고 맞지 않죠. 그런데 세상은 굳이 '돈'이라는 기준 하나를 갖고 많은 것들을 따지잖아요. 어떤 교육이 돈이 더 많이 들고, 어떤 교육이 돈을 더 많이 벌고…. 그래서 이 작품이 던지는 고민의 결이 참 좋다고 생각해요. 항상 공연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고, 특히 가르치는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이 와서 보시고 같이 고민해 주시면 좋겠어요." |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
셰필드 고등학교에 새로 온 보충교사 어윈은 '가르치는 것'과 '사는 방식'이 다른 사람이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건 대담하게 통념을 뒤집고, 새로운 논리를 만드는 법이다. 아이들의 진부한 답안지에 '예수의 음경 포피' 같은 걸 추가해 심사위원들에게 '한 줄기 햇살'로 느껴지게끔 하는 방법들. 하지만 막상 그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다소 소심하고, 어수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데이킨이 그에게 호기심을 갖고 접근했을 때, 어윈은 극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다소 거리를 두며 어색해한다.
데이킨을 소화하던 배우 박은석이 처음 어윈을 소화했을 때, 이전까지의 어윈들과는 다소 결이 달랐다. 데이킨이 주도권을 갖고 어윈을 밀어붙이는 관계가 아니었다. 박은석의 어윈은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훨씬 침착하고 차분하게 관계를 풀어갔다. 언뜻 능수능란해 보이기도 하고, 또 언뜻 데이킨의 속내를 이미 파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네가 커서 된 게 나다'라는 태도 같기도 하다. 이번 10주년에서도 그의 어윈은 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또 제가 어윈들을 많이 봐왔고, 많이 상대해 봤잖아요. 우선 어윈에게 은연중에 깔린 동성애 코드를 직접적으로 그렇게까지 드러낼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작품 안에 그런 소스가 있지만, 작가가 수면 위로 대놓고 오픈하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그게 일상인 것처럼, 당연한 듯이, 그냥 너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하죠. 만약 어윈이 데이킨한테 과민 반응을 하거나, 그런 상황들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면 오히려 작가의 의도랑은 안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해석을 하고 싶었고요.
어윈은 저희 대사에도 있는 것처럼 '클렌데스틴(Clandestine)'한 인물이죠. 뭔가 은밀하고, 숨기고, 그런 거에 더 초점을 뒀어요. 보물 상자를 좀 더 깊이 숨겨놨다가 단계를 거쳐 꺼내는 느낌이 살짝 있다고나 할까요?"
▲ 겉으로 봤을 때는 아니겠지만 "겉으로 저를 보실 때는 어윈의 가치관을 더 따르는 이미지로 보실 것 같아요. 물론 제 모습 중에 되게 어윈 같은 게 있죠. 하지만 저 스스로 저를 평가할 때는, 헥터가 지향했던 삶의 가치관과 더 많은 면이 닮은 것 같아요. 물리적으로 '내가 뭘 갖겠다'라든가,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나한테 집중시키고 싶다'라거나 이런 것보다는 오히려 '내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게 무엇일까'에 삶의 의미를 둬요. 양평에 살고,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하고, 어드벤처를 즐기고, 자전거 타고, 등산하고, 산에서 자고, 캠핑하고 이런 게 다 '어떻게 보일까'가 아니라 제가 좋아서 하는 거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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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데이킨을 바라보는 포스너는, 어윈의 시선이 항상 데이킨에게 향해 있다는 걸 눈치챈다. 데이킨이 어윈에게 느낀 것이 사랑은 아니었다고 한다면, 반대로 어윈이 데이킨에게 느낀 감정은 무엇일까? 포스너가 질문한 것처럼, 어윈은 데이킨을 정말 좋아했을까?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죠. 사랑일 수 있겠죠. 마치 대학생 선배가 고등학생 후배를 좋아하듯이, 둘이 합법적인 나이가 되고 나면 사랑이 이루어질 수도 있듯이요. 학생과 선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명확한 선이 있기 때문에 절제하고 있지만, 어윈에게는 사랑이 맞는 것 같아요.
어윈이 보았을 때 데이킨은 도발적이고, 완벽한 아이 같으면서도 자기 말을 잘 따르잖아요. 나중에 에세이를 쓰는 내용들을 봤을 때 자기 거를 완전히 흡수하고, 똑똑하고, 잘생기고, 그리고 이성애자죠. 그러니까 자기가 갖지 못한 모든 거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미래의 나'의 모습들을 갖고 있는 캐릭터. 어윈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갖고 있는 데이킨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거죠."
데이킨이 어윈이 갖지 못한 것을 전부 갖고 있었다면, 포스너는 어윈이 이미 갖고 있는 걸 그대로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박은석은 단순히 성적 정체성만이 아니라, 어윈의 유년기와 포스너의 유년기가 비슷했으리라 추측했다. 집안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을 것이고, 억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을 것이고, 성소수자인 것을 밝힐 수도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어윈이 가지고 있는 모든 치부, 숨기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들이 정말 거울인 것처럼 포스너를 통해 다 보이거든요. '포스너를 보면 어렸을 때 나약했던 나(어윈)의 모습들을 보는 것 같아' 그렇기 때문에, 나랑 너무 닮은 모습 혹은 나의 싫어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해주는 이 사람이 그냥 싫은 거고 거부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애써 모른 척하죠. 왜냐하면, 이 친구랑 동조하기 시작하면 나는 또 나의 약점들에 집중하게 되고, 과거에 우울했거나 힘들었던 나의 모습이 연상되잖아요. 어윈은 그 과거에서 최대한 벗어나서 더 강인한 내 자신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포스너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던 거죠.
하지만 어원은 포스너를 되게 아픈 손가락으로 보고 있어요. 연민이나 동정심이 있죠. 하지만 그게 약점이 될까 봐 최대한 숨기고 들어주지 않았죠. 포스너에게 정말 해주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지만, 하지 않잖아요. 나중에 어윈이 BBC에서 방송 녹화 도중에 포스너가 찾아오자 막 소리 지르고 내쫓잖아요. 그러고 나서는 뒤를 돌아봐요. 약간 포스너에 대한 죄책감도 있죠. 마지막에 포스너를 바라봤을 때, '내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었는데 저 친구한테 그러지 않았다'라고요.
한편으로는 어윈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래 주기를 바랐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무도 손 내밀어 주지 않았고, 본인 스스로 그냥 강해져야만 했죠. 자기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오면서, 한편으로는 포스너도 그러길 바랐을 거예요. 안쓰러우면서도 나의 나약함을 다시 연상하게 하는 존재, 그게 어윈과 포스너의 관계라는 게 저의 해석입니다."
"표리가 있다는 건, 진실되지 않다거나 무언가 감춰둔 동기가 있다는 뜻"
박은석은 어윈을 '표리한' 어윈으로 규정했다. 본래 '표리'는 겉과 속을 뜻하는 명사이다. 그래서 '표리가 있다'는 말과 행동이 속마음과 다르다는 뜻이다. 우리말 문법상 있을 수 없는 '표리하다'는, 명사를 동사 형태로 변화시킨 것이고, 겉과 속이 다른 상태를 의미하는 형용사로 쓰이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의 언어유희와는 반대의 움직임이다.
"어윈은 굉장히 숨길 게 많으면서 성공에 대한 욕심도 크죠. 어윈은 그때 당시의 성소수자로서 엄청나게 자기를 지켜야 하고, 숨겨야 할 게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갑옷이나 방패들이 매우 크고 단단해야 한다고 저는 느꼈죠. 어윈은 셰필드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다 명문대학교에 합격시키고, 아이들의 성공을 바탕으로 자신도 저널리스트로서, 나아가 방송을 통해 유명 인사까지 되어 성공하는 인물이잖아요. 그러니 표리할 수밖에요."
작품이 후반부로 들어서면, 왜 시간이 흐른 뒤의 어윈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나오는지 그 과정이 밝혀진다. 헥터의 오토바이를 얻어 탔다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 데이킨과의 약속을 가정법으로 바꾸어 버린 사고. 박은석은 어윈을 "굉장히 방어 기제가 강한 캐릭터"라고 규정했다. 출신 대학을 속인 것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포스너의 고백에도 밝히지 않았던 것도 모두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같은 어윈의 방어 기제는 '사고' 이후에 더 도드라진다.
"어윈은 그 사고 때문에 오히려 더 그렇게 방어적으로 나아갔을 것 같아요. 이제 약점이 하나가 더 생긴 거잖아요. 성소수자인데 이제 장애인까지 되어버렸으니까,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자기는 이제 살 수가 없는 거죠. 거기서 더 강해질 수밖에 없죠. 그리고 유명해지면서 이제는 지킬 게 너무 많아졌죠.
정말로 숨기고 싶은 부분인데, 포스너가 그거를 책까지 쓴다고 하고 녹음까지 하니까 나의 치부를 잡아내서 이걸 드러내고 싶어 하는 그 의도가 딱 들킨 거잖아요. 어윈이 화를 내는 건 전적으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예요. 이제 다리까지 불편하니까, 녹음기를 또 물리적으로 빼앗을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게 가장 큰 분노의 지점이 아닌가 해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포스너는 어렵게 입학한 대학교를 그만두고 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들을 주제로 책을 쓰고 있다. 출판사에서 유명 인사가 된 어윈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책을 낼 수 없다고 하자, 포스너는 몰래 녹음기까지 들고 어윈을 만나러 온다. 어윈은 포스너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자신과 데이킨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자신은 헥터와 다르다고 소리친다.
"헥터와 다르다고 소리치는 게 헥터를 향한 원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사고는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어떻게 보면 자기가 탄다고 했으니, 어원의 잘못일 수도 있고, 스크립스의 말처럼 오토바이를 처음 타본 어윈이 중심을 잘못 잡는 바람에 헥터마저 죽은 게 되어버렸으니, 누구의 탓이라고도 할 수 없잖아요.
헥터가 아이들을 만진 것 자체에 대한 혐오도 아닌 것 같아요. 포스너가 계속 끄집어내려고 하는 나의 치부, 약점에 대한 게 제일 크죠. '데이킨과 아무 일도 없었다', '뭘 하지 않았다'는 건 결국 '나는 그 문제에 있어서 굉장히 결백해'라는 것. 출판사도 그 내용이 없으면 이 책을 출판 안 한다고 그러잖아요? 자극이 있어야 하니까, 그 이야기가 자극제로 쓰이면 또 변질할 수도 있고, 그 내용이 더 과장될 수도 있죠, 어윈은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고요. 요만큼의 사실만 줘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본인이 그걸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자신의 명예에 엄청나게 큰 금이 간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과민 반응을 하는 거죠."
▲ 어윈으로 후배들의 데이킨과 호흡하며 "되게 풋풋하고, 제가 신인이었을 때도 생각이 많이 나요. 그 친구들이 물론 저보다 후배이고, 저보다 나이도 어려서 데이킨을 경험한 게 저만큼 많지는 않죠. 그래도 믿고 데이킨이라는 배역을 맡길 수 있는 그런 확신이 생긴 것 같아요. 매일매일 무대를 밟아오면서 후배들이 성장하는 모습이 또 눈앞에 보이니까, 저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
ⓒ 곽우신 |
박은석은 "어윈에게는 계획이 다 있었다"라고 말했다. 셰필드 고등학교에 와서, 아이들을 최대한 많이 대학교에 합격시키고, 인지도를 쌓고, 명성을 올리고, 그래서 정식 교사가 되고, 다른 명문 고등학교로 스카우트 되고, 그걸 발판 삼아 더 성공하는 것. 헥터의 일반교양 수업 시간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 무수한 지식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직접 활용할 수 있게 만들지에 대한 것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서 난롯가에 앉았을 때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다음 달 시험을 위해서 말이다.
다만, 어윈이 자신이 가르치는 그 논리를 정말로 신봉했는지는 모호하다. "시험에 있어서 진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어윈에게 데이킨도 묻는다. "정말로 그렇게 믿으시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라고. 홀로코스트 토론 때를 보면, 어윈은 너무 나가는 표현에 대해서 만류하고 이를 완곡한 뉘앙스로 수정한다. 반면, BBC 방송 속의 그는 "이상의 극치" 같은 표현을 쓰며 자극적으로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죠. 내면의 깊은 곳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있지만, 최대한 자기 스스로 코칭해요. 그렇게 기술적으로 생각하게끔 자신을 절제하고 속이는 거죠.
홀로코스트 토론 때 어윈이 나서는 이유들 중 가장 중요한 건 그렇게 해야 데이킨이 심사위원들에게 잘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데이킨은 하나를 알려줬더니, 열까지만 하면 되는데, 이걸 백까지 가는 거죠. 너무 앞서가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하면 너무 네가 나쁘게 보인다. 그거는 자극이 아니라 상처다. 여기까지 가면 안 된다. 그 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라는 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하지만, 결국은 어윈도 데이킨과 같아지죠. 린톳 선생님이 그러잖아요. '새로운 역사적 개념을 만들어 댈 때마다 방방 뛴다'라고, '역사학자가 무슨 개떼도 아니고'라고요. 어윈이랑 데이킨의 모습이 딱 그 모습이거든요. 사실 헨리 8세를 이야기하면서, 알라메인 전투를 이야기하면서 서로 좋아하고 막 웃고 떠들고 그러잖아요. 그게 그 방방 뛰는 둘의 모습인 거예요. 새로운 해석을 찾았다고, 새로운 역사의 관점을 찾았다고 방방 뛰면서 좋아하며 그걸 답안지에 활용하고, 방송에서 이야기하지만, 작가는 린톳을 통해 그걸 비판하는 거죠."
"모든 젊은이들이 행복으로 가는 길고 긴 활주로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박은석에게 같은 시즌에 데이킨과 어윈이라는 두 인물을 오간 것은 "머릿속에 저장해 둔 저장 폴더가 달라서" 크게 어렵지 않았다. 대신 해를 거듭하면서 그에게는 다른 고민이 생긴다. 작품을 다시 보러 오는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 매번 똑같은 공연을 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작품을 해치지 않도록 기본을 지키는 것.
그 과정에서, 또 어윈을 연기하며 중요시하는 건 '정적'이었다. "관객들이 이렇게 비싼 돈 주고 멀리까지 와서 좋은 공연을 보잖아요"라며 "푯값을 만약에 6만 원을 냈다. 그러면 저는 10만 원어치 공연을 해드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빨리하고, 빨리 대사치고, 빨리 집에 가면 3만 원짜리 공연밖에 안 되는 거로 생각한다"라며 작품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그가 쓸 수 있는 정적의 순간들을 최대한 많이 활용하면서 공연을 풀어간다.
"기본적으로 저는 대사를 빨리 안 해요. 그렇다고 해서 제 대사가 느리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제 심리적 '포즈(Pause)'라고 그러죠? 저는 그 포즈를 쓰는 걸 좋아해요. 그게 무대 위에서 소통이고 전달이거든요. 감정이라는 것의 전달이 말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 말의 부재에도 엄청난 감정이 전달돼요. 그런 게 없으면 또 전 너무 밋밋하다고 봐요.
예를 들면, 어윈의 첫 수업 때 들어오자마자 바로 학생들의 리포트를 던지면서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분위기를 살리면서 하는 게 더 재미있죠. 들어온 나를 학생들이 다 바라보고 있는데, 그중에는 나를 좀 만만하게 보는 시선도 있죠. 그러니 일단 모든 학생을 한 번씩 다 쳐다봐 주면서, 이 학생들의 태도를 관찰하는 거죠. 헥터와의 공동 수업 때도 마찬가지죠. 들어오자마자 '누가 먼저 시작할래?' 이러면 재미없죠. 아이들이 수군대면서 '어떡해야 하지?'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 그 분위기를 살려야죠. 포스너한테도 '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부모님께 전부 다 얘기하니?'라고 바로 말하는 게 아니라, 제가 교장한테 불려 가서 깨지고 왔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다는 걸 그 잠깐의 정적으로 알려주는 거죠.
그걸 안 살리고 가면 저는 그게 너무 답답해요! 작품 안에 그런 모멘트들이 있는데, 그 순간들을 다 찾아서 쓰고 가고 싶다 보니 상영시간도 조금 길어지는 것 같아요. (웃음) 그 순간이 좋아요. 딱 정적이 있을 때 집중이 되다가, 제가 정적을 또 딱 하고 깨면, 그 모든 관객이 숨을 되찾거든요. 그게 느껴져요. 나만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함께 이 무대를 해나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요. 그래서 연극이랑 같이 '호흡'한다고 하잖아요. 오히려 정해진 대사를 빨리빨리, 바로바로 해나가는 건 오히려 가짜처럼 느껴져요. 말과 말 사이의 정확한 눈빛 교환, 끄덕끄덕하는 리액션, 상대의 그 반응을 보고 해석해서 내가 하는 반응까지."
▲ 그만둔다 말해도 그만둘 수 없는 이유 "그런데 이것보다 더 좋은 작품이 많이 없어요. 아무리 제가 작품을 많이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그중에는 자극적인 것, 웃긴 것, 재밌는 것, 힘든 것도 있지만 이렇게 정말 꽉 찬, 굉장히 꽉 찬 텍스트와 꽉 찬 메타포의 작품이 없어요. 정말로 주옥같은 작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이나 전 세계 통틀어서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히스토리 보이즈>를 제일 오래 하고 있죠. 그러니까 제게는 좀 특별한 공연이 됐죠. <히스토리 보이즈>의 히스토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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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것처럼 <히스토리 보이즈>는 역사가 됐다. 본토인 영국에서보다도 한국 프로덕션에서 더 많이 상연되며,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가 무대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브라운관을 통해 인지도를 넓히기 시작할 때, 많은 인기를 구가하는 배우가 됐을 때, 그 변곡점마다 그는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무대로 돌아왔다.
"제가 이 작품 처음 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데뷔작은 아니지만 제가 이제 막 대학로에 갓 나온 신인이었을 때였거든요. 돌아보면 제 '인생 박은석'에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계속 <히스토리 보이즈>를 통해서 순환하고 있어요. 이 작품을 통해서 다른 연극도 하고, 또 돌아와서 이 작품 하고 방송에 데뷔하고, <펜트하우스> 잘 되고 나서 다시 돌아와서 또 하고…. 제 모든 역사가 이 안에 있는 거예요, <히스토리 보이즈>의 10년 안에. 그냥 제 삶 안에서 <히스토리 보이즈>가 드러나는 것들이 있고, 또 내 삶을 통해서 이 작품을 하는 데 밑받침이 되는 것들도 있으니까요. 사실 작품이랑 제가 이제 엉키면서 또 새로운 탄생이 되는 거죠. 어떤 순간들이 그리고 삶이."
'이제 더는 못하겠다'라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이 작품으로 돌아왔다. 데이킨이 어윈이 된 것처럼, 언젠가는, 20주년쯤 됐을 때는 헥터를 연기하지는 않을까? 박은석은 웃으며 "저희 공연이 그렇게까지 오래 할지 모르겠지만, <히스토리 보이즈>가 역사가 되면 또 할 수도 있겠죠?"라며 "20주년쯤 되면 헥터를 할 수도 있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터뷰의 말미, 관객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다시 헥터의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헥터가 잘못했죠.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어요. 하지만 대사에도 나오잖아요. '헥터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식으로 가르칠 시간이 없습니다'라고요. 잘못한 건 맞는데, 그것을 넘어서서 헥터가 왜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는지, 그의 교육이 왜 좋은 가르침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해요. 이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한 모든 것들이 무조건 나쁜 짓이 되고, 무엇을 하든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요.
왜 이 사람이 학생들의 인생에 한 조각씩 남아 있는지, 그게 뭐였는지 고민해 주시면 어떨까 싶어요. 헥터는 기억에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학생들의 기억에 남았잖아요. 헥터라는 인물은 사실 누가 와서 연기를 해도, 아무리 잘해도 항상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에요. 20주년에 만약 제게 헥터를 하라고 한다면, 그게 가장 큰 고민이겠죠. '이 캐릭터는 내가 아무리 해도 모르겠는데, 여기(성추행)에만 포커스가 갈 텐데' 한다면…. 글쎄요, 그 고민이 풀려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또 만약에 헥터가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마냥 좋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이 작품이 지금처럼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해요. 인간은 다 그런 양면이 있잖아요. 그래서 참 곱씹을수록 작가가 참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요. 10년 동안 이 작품을 하면서, 10년 동안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더 대단한 작품이라는 게 느껴져요."
이번 시즌을 마치면서, 배우 박은석은 어떤 것들을 넘겨줬지만, 또 어떤 것들은 아직 넘겨주지 않았다. 그러니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또 돌아올 것이고, 그 돌아오는 무대에는 박은석의 자리도 있을 것이다. 데이킨을 소화하던 박은석이 어윈을 맡고, 언젠가 헥터로 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히스토리 보이즈>는 여전히 <히스토리 보이즈>일 것이고, 박은석은 역시나 배우 박은석일 테다.
자신의 발자취로 역사를 쓰고 있는 이 배우와 동시대를 살아가며 마주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역사와 마주하는 시간, <히스토리 보이즈>의 20주년 그즈음 박은석의 헥터는 또 어떤 깊이의 인물일지, 그의 고민의 결과물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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