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서 선배로, 대본 넘겨줄 때 됐다" 박은석의 연기 역사
[곽우신 기자]
▲ '아마도 마지막' 데이킨을 넘겨주며 "이제 그만할 때가 됐는데…. (웃음) 매번 할 때마다 '이제 정말 그만해야지' 그래요. '넘겨줘라, 때로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라고 하잖아요. 저 남의 대사도 다 외우고 있어요. (웃음) <히스토리 보이즈> 대사를 통째로 다 외우고 있는 것 같아요. 데이킨은, 아마도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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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는 박은석도, 드라마나 예능을 하는 박은석도 좋지만, 역시나 가장 좋은 건 연극하는 박은석이다. <수탉들의 싸움>이나 <프라이드>를 하는 박은석이 그립고, <나쁜자석>이나 <엘리펀트 송>을 하는 박은석도 다시 보고 싶고, <카포네 트릴로지>나 <벙커 트릴로지>에서의 박은석도 훌륭했지만, 역시나 연극하는 박은석 중에서도 최고는 <히스토리 보이즈>를 하는 박은석이다.
배우 박은석을 처음 본 것은 2014년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재연 때였다. 보자마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데이킨'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만 같았다. 오만한 콧대를 치켜세우며, 그는 소위 '싸가지 없는' 태도로 무대를 휘저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는지 분명하게 아는 배우였고, 그걸 아주 똑똑하게 해내는 배우였다. 그의 싸가지 없음을, 자유분방한 연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2013년에 초연을 시작한 이후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히스토리 보이즈>는 이 작품 자체가 대한민국 대학로의 역사 중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재연에서 처음으로 합류한 이후, 배우 박은석은 2023년 칠연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히스토리 보이즈>로 돌아왔다. <히스토리 보이즈>의 역사에서 박은석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된 것이다. 박은석 본인이 <히스토리 보이즈>의 역사가 된 셈이다(관련기사 : 훗날 세월호 참사가 시험 문제로 나올 때).
박은석은 2020년까지 셰필드 고등학교 '옥스브리지' 반의 고등학생 '데이킨'을 연기했지만, 2022년부터는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 '어윈'으로 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배우가 같은 작품의 다른 인물을 맡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그가 데이킨이 아니라 어윈을 맡게 되는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이 아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박은석의 데이킨이 없다는 건, 마치 내 관극 역사의 한 페이지에 종언을 고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DVD에 남은 모습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할 것 같았지만, 10주년을 맞은 올해 그는 한 번 더 데이킨을 맡았다. 데이킨과 어윈을 오가며 한 시즌을 오롯이 소화한 그는, 자신의 연기 역사를 나름의 방법으로 넘겨주고 있었다.
지난 7월, 두산아트센터 인근 카페에서 공연 직전 만난 그는 데이킨을 "이제 진짜로 저희 대본대로 넘겨줄 때가 됐다"라고 말했다. 이 글은 나를 포함해 아직 박은석의 데이킨을 넘겨줄 수 없는, 넘겨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기록이다.
▲ <히스토리 보이즈>를 다시 한다는 것 "제가 또 한두 살을 먹잖아요? 제가 또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들이 또 다르잖아요. 책도 1년 뒤에 읽으면 또 다른 게 보이고, 여러 번 읽을 때마다 다른 게 느껴지듯이, 제 고민도 똑같은 것 같아요. 연기를 하다가 보면 수면 위에 하나둘씩 탁탁 올라와요. 그러면 이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노선을 만들어 나가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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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주 무대는 셰필드 고등학교의 '옥스브리지' 반이다.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합성어인 '옥스브리지'는 말 그대로 이 고등학교에서 명문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우수 학생들의 특수반을 의미한다.
데이킨은 이 특수반에서도 가장 명민하고 우수한 학생이다. 그는 외모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신감이 넘치며, 교장의 비서인 피오나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반의 남학생 포스너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쓸모없는 시와 역사를 가르쳐주는 헥터의 '일반교양' 수업에도 크게 감흥은 없다.
대신, 새로 학교에 와서 자신들에게 대입을 위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어윈이 그의 관심을 끈다. 통용되는 상식을 뒤집고 '시소의 반대편'에 앉는 법을 통해 시험관을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술. "전쟁 기념관이 세워지는건,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하기 위해서"라든가 "제1차 세계대전은 비극이 아니라 실수였다"라든가.
"데이킨이 어윈에게 관심을 두는 건 일차적으로는 호기심 때문이에요. 과거의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었지만, 그냥 데이킨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부분이 있는 거죠. 자기가 제일 잘났고, 자기보다 똑똑하거나 더 우월한 사람은 못 봤는데, 어윈이 들어오자마자 기선 제압을 해버리잖아요? 어윈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 모든 생각들을 너무 진부하다고 표현해요. 나(데이킨)만 답안지를 이렇게 쓰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모두가 이 길로 나아가고 있으니 나도 그냥 평범한 생각밖에 못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죠. 어윈이 제 시야를 넓혀주는 거예요.
어윈이 역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데, 그 메소드(Method)가 향후 나아가서 이성을 대할 때든, 사랑을 대할 때든, 직업을 대할 때든, 이 모든 것에 적용이 되니까요. 사실은 데이킨 입장에서 자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주는 거로 생각했겠죠. 마치 '허미트 크래브(Hermit Crab)', 소라게처럼요. 소라게가 자신의 집을 옮겨 다니잖아요. 그러니까 새로운 집을 마련하듯이 어윈을 통해서 그런 거를 발견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무한한 어떤 가능성, 그거를 열어준 키(Key) 역할을 해준 게 어윈이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진실을 덮고 있는 포장지를 다 벗겨줬을 때, 내가 역사를 완전히 새로운 해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씨앗을 줬을 때 거기서 오는 어떤 지적 섹시함이 있었겠죠. 그래서 그를 정복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 것 같아요. '이 사람(어윈)은 정말 지능적으로 나(데이킨)보다 우월하니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뭘까?' '젊음, 육체, 섹슈얼한 어떤 것으로 정복할 수 있지 않을까?' 데이킨은 어떻게 보면 야생 동물이 상대 동물의 약점을 파악하면 그걸 이용해서 자기가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잖아요."
박은석은 데이킨이 어윈에게 갖는 감정이 "사랑은 아니다"라고 했다. 데이킨은 어윈이나 포스너와 달리 동성애자도 아니다. 그저 육식 동물의 관점에서 상대의 약점을 물어, 포식하고 정복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인물로 정의했다. 어윈이 사실은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도, 그가 어윈에 대한 호기심을 멈추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데이킨이 옥스퍼드 대학교의 캠퍼스를 찾았을 때는, 자신이 학교에 다니며 운동도 하고 파티도 다니는 어윈의 모습을 좀 상상해 보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어윈의 이름이 졸업생 명단에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는 더 재밌는 거죠. '내가 거기까지 갔는데 나를 바보로 만들어?' '네가 뭔데? 그럼 넌 뭐야? 이제 그러면 너의 진짜 모습을 보여줘'라는 것. 어윈은 표리가 있죠. 어윈이 감춰둔 동기가 무엇인지 데이킨은 또 알고 싶은 거죠."
"포스너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너가 포스너를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데이킨에게 포스너와 어윈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어윈은 호기심을 끌지만, 포스너는 그렇지 않다. 데이킨에게 "포스너는 나약"하고,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 다른 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언제든지 "접근해서 가질 수 있"으니 "도전 정신"을 자극하지 않는다.
"포스너는 그냥 데이킨을 맨날 졸졸 쫓아다니고 좋다고 하지만, 데이킨 입장에서 얘한테 배울 게 뭐가 있고, 얻어낼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포스너를 무시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항상 거기에 있는. 가끔 귀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 거죠. 만약에 스크립스 정도 되는 애가 나를 좋다고 고백했다면 뭔가 반감을 갖고 걔를 굉장히 멀리하겠죠. 그런데 포스너이니까, 사실 데이킨에게 위협 대상은 아니에요. 포스너가 신체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나를 누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전혀 경계심도 없는 거죠. 그렇다고 피오나를 만나고 있는데 굳이 포스너를 받아 줄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냥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고 맨날 그러겠죠."
반면, 데이킨과 어윈 사이에는 포스너와 달리 "좀 더 재밌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가정법이 아니"라며,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던 그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고 가정법으로 남아 버렸다. 헥터의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어윈이 사고를 당한 이후, 더 이상 데이킨과 어윈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이 사람(어윈)이 데이킨 입장에서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아요. 하체 마비까지 됐으니, 성적으로도 뭔가 궁금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뭣보다 데이킨에게는 '한때 뭔가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어도 내 인생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아'라는 게 있죠. 어쩔 수 없는 사고였고, 굳이 거기에 연연하지도 않았겠죠. 그냥 대학 가서 여자애들 잘 사귀고, 인턴 하다가 잘 취직해서 돈 잘 벌고, 하지만 그 과정에는 항상 허정함이 있겠죠, 사랑이 없고.
데이킨은 좀 사는 집안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부족한 게 없으니까, 결핍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조금 모든 게 당연시되는 그런 캐릭터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집에서 접시를 깨뜨렸으면 당연히 엄마가 뛰어와서 치워주는 거고, 돈이 없으면 당연히 아빠가 용돈을 주는 거죠. 어디 밤늦게 놀았는데 집에 올 수단이 없으면 누군가가 데리러 와주고요,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런 게 아니라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 해결책이 있었겠죠.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가고 싶은 것도, 그곳에 가면 존중받고 인정받고 옆에서 박수받고 그런 환경이기 때문일 뿐이에요. 모든 사람이 가고 싶어 하니, 자연스럽게 그 욕망이 주입된 것일 뿐, '나는 옥스퍼드에 가서 이렇게 하겠다'가 없죠. 포스너는 명문대에 갔지만,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니네'하고 그만두잖아요. 하지만 데이킨은 주입된 욕망이었음에도 어윈에게 살아남는 방법을 너무 잘 배웠죠. 불을 지피려면 그냥 작은 불씨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요? 어윈은 데이킨의 삶에 그 작은 불의 씨앗 하나를 던져줬고, 그게 이제 산불처럼 되는 거죠. 하지만 그게 다 타고 나면 남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허정한 거죠. 화려하지만 남는 게 없는."
"쟤는 경박하고 유치하게 잘난 척 하는 겁니다"
"허정하다", 국립국어원은 이 말을 "겉으로 보기에는 알뜰한 듯하나 실속은 없다"라고 풀이한다. 박은석은 '데이킨'을 "허정한 데이킨"이라고 정의했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그 안은 텅 비어 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잘난 척하기 일쑤이고,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도 항상 주도권을 쥐는 것도 데이킨이다. 하지만 사실은 박은석의 말마따나 "우물 안 개구리"이다. 사실은 프리드리히 '니체'를 정확히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몰라서 망신을 사기도 하는, 어윈이 가르쳐준 걸 써먹겠다고 너무 나서느라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선을 넘어 버리는 인물.
'홀로코스트'에 관해 학생들이 토론하는 장면은 <히스토리 보이즈> 안에서 두 역사관과 교육관이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홀로코스트를 그저 "시험 문제에 나올 법한 토픽" 중 하나로 치부할 수 있는가? 공부는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교육은 머리가 하얗게 세서 난롯가 앞에 앉아있을 때나 필요한 게 아니다"라는 어윈, 그리고 "그것들은 심장으로 배운 것들이다. 그래서 있어야 할 곳도 바로 여기"라는 헥터. 헥터의 대변인이 포스너라면, 어윈의 대변인은 데이킨이다. 박은석의 데이킨은 유독 날카롭고, 매섭게 상대를 몰아붙인다.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학생들끼리 토론하는 장면에서 데이킨이 세게 이야기하면 그게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수위를 조절하면 캐릭터가 안 살아요. 그래서 데이킨이 나쁘게 보이고, 싸가지 없게 보이게 연기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데이킨을 할 때 일부러 수위 조절을 잘 안 해요. 왜냐면 걔는 그런 캐릭터인데? 그걸 가져가야 하니까요.
관객들한테 사랑받으려고 데이킨을 연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데이킨을 연기하는 건 작품 속에서 작가가 하는 말을 전달하고자 하는 거니까요. 일부러 그런 허정함이 보여야 하는 거죠. 이 친구가 이렇게 완벽해 보여도, '아, 저런 면에 있어서는 약하구나' 하는 게요.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치부가 있죠. 데이킨의 치부는 그거예요. 자기가 너무 똑똑한 게 자기의 치부가 될 수 있다는 걸 또 모르는 것."
▲ 그날그날의 '실' "3시간 공연하면서 한 1시간 차 때 뭐 하나 바꾸면, 그 뒤의 나머지 2시간도 바뀌어야 하거든요. 노선이나 디테일이라는 게 이거 하나만 바꾸고 나머지를 안 바꿀 수 없어요. 그 말 한마디, 해석 하나가 커요. 실 하나만으로 엮을 때 중간에 다른 색깔로 바꿀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이게 다 이어지려면 하나의 실로 다 가지고 가야죠. 그날 공연이 뭔가 안 풀리다가도 하나가 풀리니까 막 다 풀릴 때도 있고, 반대로 하나가 막히니까 나머지도 다 막힐 때도 있고 그래서 재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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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윈의 검투사가 되어 논리를 펼치는 데이킨을 보며 헥터는 안타까워한다. 데이킨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치장된 지식을 늘어놓을 때, 데이킨의 가슴에 무언가 넘겨주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자책한다. 데이킨은 헥터의 일반교양으로부터 아무것도 넘겨받지 못한 것일까?
"마지막에 헥터 선생님의 리포트를 던질 때도, 아이들은 다 하나씩 주워서 그걸 보면서 헥터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데이킨은 혼자 아무 말도 안 하잖아요? 그건 바로 데이킨이 정말 허정한 인물이라는 거죠. 정말 이 많은 친구가 학교나 혹은 헥터에 대한 기억과 감정들을 마음 한쪽에 하나씩 갖고 있는데 데이킨은 없다는 뜻이에요. 데이킨은 정말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만 들어가면 되고, 성공만 하면 되는 아이였던 거죠. 지중해 놀러 가고, 돈 좋아하고, 재밌게 놀고, 하지만 자신의 안에 그 허전함이 왜 그런지도 모르고 허정한 채 사는 거죠.
일반교양 수업 때도, 친구들이 수업 중간중간에 시를 외우거나 하면 데이킨은 지루해 해요. 수업 중에 다 같이 연기를 할 때도 '빨리하고 넘어가자' 이런 식이죠. 그게 <히스토리 보이즈>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마치 <죽은 시인들의 사회>처럼 헥터 선생님으로부터 인생에 정말 필요한 가르침을 배우지만, 누군가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죠. 대신 그 누군가는 어윈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완벽한 대비죠. 데이킨은 '현대 사회에 필요한 교육'이라는 어윈의 관점에서 스펀지처럼 좋은 흡수력을 가진 학생인 거죠."
교육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헥터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동시에 헥터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옥스브리지 반 학생들을 돌아가며 자신의 오토바이에 태우고 "학생 성기에 손을 대고 시속 50마일로 달리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헥터 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라며 "욕구 충족이나 다른 게 아니라, 안수"였다고 하지만, 동료 교사 린톳의 말마따나 "어마어마한 헛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데이킨은 그를 "불쌍해"하면서도 동시에 "안 불쌍해"한다. 그리고 교장이 비서 피오나에게 저지른 성추행을 지적하며, 정년 전에 헥터가 강제로 은퇴하지 않도록 돕는다.
"저는 인간적인 연민이라고 생각해요. '불쌍한 노친네 우리밖에 모르는데, 이 학교밖에 모르는데' 약간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동맹 의식 같은 게 조금은 있지는 않을까 해요?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재미있게 수업해 줬고, 우리끼리 쉬쉬하면서 노는 분위기도 있다 보니 잔정도 좀 생긴 거죠. 그렇다고 선생님으로서의 존경심까지는 아니고요.
헥터가 우리한테 잘못하긴 했지만,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굉장히 큰 문제이지만, 데이킨에게는 자기 인생에 엄청 트라우마가 올 정도의 그건 아니었던 거죠. 데이킨이 오토바이에 타겠다는 건 '오늘 음식물 쓰레기 치울 차례, 누구? 아, 아무도 안 하네?' 같은 거고요. '그냥 빨리하고 끝내자' 약간 이런 정도의 느낌인 것 같아요. 또, 교장도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데이킨은 다 알고 있잖아요. 데이킨 성격상 '당신이 뭔데 헥터한테 그러느냐?' 하면서 또 가만히 못 있는 거죠."
대학로의 상업극 중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히 다시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 그리고 이 작품을 거쳐 간 배우들이 다시 모여 과거를 회고하고 이를 기념할 수 있는 공연이 얼마나 될까? 박은석은 "헥터의 수업에 있었던 그 학생들처럼, 지난 10년 동안 그 많은 사람이 지나가도 다시 돌아오고 있다"라며 "분위기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맹 의식이라는 게 진짜 있다"라고 웃어 보였다. 그런 동맹 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는 선배로서 이 작품에 함께하는 후배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기 위한 고민을 더 많이 했다.
"데이킨을 연기하면 재밌어요. 자유롭고, 동선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표현도 조금 더 많이 할 수 있죠. 그런데 어윈을 연기하다 보면 사실 절제를 굉장히 많이 해요. 저는 무대 연기를 할 때 되게 충동적으로 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엄청 극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정도로요. 왜냐하면 저도 좀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야지, 같이 하는 배우들의 반응도 되게 살아있게 되거든요. 제가 맨날 똑같이 하고, 매일 변수 없이 하면, 같이 하는 후배들도 맨날 똑같이 하고, 변수 없이 하거든요.
그러면 이제 매너리즘에 빠지는 거죠.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호흡을 다르게 쓴다든지, 강조를 다른 데 둔다든지, 애드리브를 한두 마디씩 중간중간에 친다든지, 그래야지 이제 살아있는 펄떡펄떡함을 느낄 수 있죠. 그리고 데이킨은 스스로 그걸 할 수 있어요. 절제를 안 해도 되니까요. 하지만 어윈은 그런 걸 누군가 끄집어내 줘야 해요. 이 장면을 재밌게 하려면 나 스스로는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먼저 도와줘야 해요. 그래서 이제 중간중간에 학생들이 조금씩 자극하는 것들이 살짝 있죠.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떤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웃음) 되게 신나서 올라갈 때도 많아요. '오늘은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오늘 캐스트를 딱 보고 '오늘은 이 친구와 저 친구한테 이런 식으로 해줘야지, 저런 걸 던져줘야지' 하죠. 예전에는 제가 제 연기에 더 집중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 친구들한테 관객의 시야가 한 번이라도 더 갈 수 있게 해요. 이제 <히스토리 보이즈>에서 제가 돋보일 필요는 없거든요. 대신 제가 이 친구한테 한마디를 던져서 얘를 보고 있으면, 그 순간 극장 전체가 걔를 볼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것들까지 다 고려해서 하는 것 같아요."
☞2편에서 이어집니다: "'히스토리 보이즈' 10년에 제 인생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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