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짝지근해' 유해진 멜로에 설득당했다
[하성태 기자]
▲ <달짝지근해: 7510> 스틸컷 |
ⓒ ㈜마인드마크 |
"이 (로맨스) 연기로도 형이 대중을 설득시키면 형은 그냥 이제는 다한 거야. (영화 <올빼미>의) 왕으로 설득시켰지, 깡패는 옛날에 많이 했지. 만약에 멜로까지 한다? 그럼 끝난 거야. 은퇴야 은퇴, 다 한 거야."
본의 아니게 배우 유해진을 강제 은퇴시키려는 나영석 PD의 너스레에 꽤 많은 분석이 담겨 있다. 유해진의 <달짝지근해: 7510> 출연에 대해서 나 PD는 "아이 말도 안 돼. 형이 김희선씨랑 연애를 한다고? 김희선씨랑 연애를 한다고?"라고 했다. 234만이 시청한 '채널 십오야' 유튜브 영상에서다.
대중의 촉에 관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영석 PD의 이러한 관객으로서의 진심이야말로 유해진과 <달짝지근해>의 대중성을 설명하는 부인할 수 없는 단서를 제공한다. 깡패역? 진짜 많이 했다. 유해진의 얼굴을 대중에게 알린 <공공의 적>의 칼잡이 용만이 대표적이다.
코미디 영화만 놓고 보자면, 유해진은 2000년대 <공공의 적> 시리즈로 얼굴 도장을 찍은 뒤 <이장과 군수>를 통해 주연으로 올라섰고, 이후 2015년 <럭키>로 697만 관객을 동원하며 홈런을 쳤다. 인생 캐릭터라 할 수 있을 <타짜>의 고광렬 이후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대한민국 배우들 중 서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다. 코로나 팬데믹19 기간 흥행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작품인 <올빼미>에선 급기야 왕을 연기했다.
그렇게 <전우치> 속 개부터 <올빼미>의 조선 왕까지, 조단역으로 출발한 유해진이 "개가 왕이 되려면 얼마나 개고생을 했겠"는가. 유해진의 전언에 따르면, <올빼미>의 안태진 감독은 왕 역할에 유해진을 선택한 이유로 "형이라면 다른 왕을 보여줄 것 같았다"고 했단다. 이 역시 유해진 연기의 너른 스펙트럼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대중들의 사랑과 감독들의 선택에 "어떻게 보면 진짜 복 받은 거"라고 말하는 이 유해진의 다음 선택이 로맨스 코미디 <달짝지근해>다. 45살이 되도록 사랑 한 번 못 해 본 남자의 연애기가 소재다. 소위 '너드'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제과회사 연구원 주인공이 싱글맘에다 적극적인 여성과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알아가게 되는 쉽고 단순한 이야기다.
할리우드로 치면 주드 애파토우 감독의 걸작 코미디 < 40살까지 못해 본 남자 >의 순화 버전 정도 된다. 1990년대의 청춘스타 김희선과 연애도 하고 키스도 한다.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는 관객들 입장에선, 진짜 다 한 거다. 그럼에도, '어떻게'는 남아있다.
▲ <달짝지근해: 7510> 스틸컷 |
ⓒ ㈜마인드마크 |
제과 연구원 치호(유해진)는 칸트 같은 남자다. 몇 개나 되는 시계가 매일 똑같은 시간에 알람을 울려주면, 이후로는 집, 차, 회사, 차, 집을 반복하는 루틴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감옥 간 형이 없으니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다. 과자 먹는 게 일이니 그마저도 잘 챙겨 먹지 않는다. 이 남자, 무슨 낙으로 살까. 그러던 치호에게 밥을 먹자는 여자가 생긴다.
싱글맘인 일영(김희선)은 돈이, 일이 좀 급하다. 실직 후 대출 이자 상담을 위해 들른 대출회사에 바로 취직해 버리는 저돌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덜컥 생긴 아이를 지울 수 없어 싱글맘을 선택한 따스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녔다. 그랬던 일영에게 형의 대출을 대신 갚기 위해 찾아온 치호가 눈에 들어온다.
<달짝지근해>는 그야말로 정석대로 간다. 멜로드라마는 연애(결혼) 이후를, 로맨스 코미디는 연애 이전을 주로 다룬다. 멜로드라마는 그래서 정치사회학이 끼어들 여지가 충분하지만 로맨스 코미디는 당대 유행이나 배우들의 매력에 훨씬 민감하다.
<완득이> <증인> 등으로 대중들과 호흡해 온 이한 감독도 이를 십분 활용한다. <달짝지근해>는 치호를 연기한 유해진과 일영을 연기한 김희선의 매력에 영화의 대부분을 기댄다. 사건이라고 부를 것이나 빌런이라고는 치호의 건달 형 석호의 진상 짓이 전부다.
영화의 나머지는 모두 치호와 일영이 밥 먹고, 운전 교습 핑계로 만나고, (치호는) 데이트 인 줄 모르고 여행가는 둘의 데이트에 할애한다. 훼방꾼을 자처하려던 조연들도 어느새 이 둘을 응원하는 처지로 변모하는데 그 묘사에 과함도, 억지도 없다. 드라마의 필수 요소인 갈등도 그리 복잡하거나 해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정석이란 표현을 쓴 건 그래서다. 그러니까 로맨스 코미디의 정석대로 관객들은 멀찍이서 두 캐릭터의 사랑과 사랑스런 면모만 물 흐르듯 지켜보면 된다. 치호는 무해한 남자고, 일영은 적극적일망정 민폐를 끼치는 사람은 아니다. 딱 거기까지다. '들쩍지근'하지도 '달착지근'하지도 않고 딱 달짝지근한 정도. 사랑에 빠진 유해진의 연기 톤이 딱 그 정도다. 편안한 마음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들을 무장 해제시킬 딱 그 정도.
자칫 심심해 보일 순 있다. 단연 유해진이란 배우 개인의 친숙하면서도 낯선 매력이 이를 상쇄한다. 사시미 칼을 휘두르고, 화투 패를 돌리고, 나쁜 짓을 지시하며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닌 사랑 때문에 마음이 두근거려 죽겠다고 약사 엄혜란에게 호소하는 유해진의 처음 만나는 연기는 분명 희소성이 있다. 수천만 관객을 스크린에서 만난 것도 모자라 나영석 PD의 예능을 통해 배우 개인의 매력을 발산하고 인지도를 넓힌 그 유해진 아니겠는가.
▲ 영화 <달짝지근해:7510>의 한 장면. |
ⓒ 무비락 |
사실 배우 개인기로 2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을 다 채우기엔 무리가 있다는 걸 감독이나 제작진 모두 너무 잘 알고 있었을 터.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 감독이나 배우들과 연이 있는 정우성과 임시완, 고아성 등 카메오들이 나름 꽤나 길게 등장하는 장면도 눈길을 끈다. 어떤 장면은 살짝 생뚱맞고 또 어떤 장면은 나름 서사에 밀착돼 있다. 카메오를 마냥 낭비하고 소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인 역력하다.
주변 캐릭터 자체는 과하지 않고 평범한 수준이지만 이런 덤덤함 또한 배우들의 친숙함으로 상쇄된다. <술꾼 도시 여자들> 시리즈의 한선화는 스크린에서도 매력 뿜뿜이고, 진선규의 엉뚱한 듯 따스한 매력도 극의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데 일조한다. 차인표의 경우, 치호와 석호의 전사를 포함해 배우 본연의 선한 이미지가 역할에 투영된 듯한 인상이 강하다. 결코 석호를 미워할 수 없도록 설정부터 강제(?)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달짝지근해>는 중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45살 남자의 첫사랑이라는 일종의 남성 시각의 판타지라고도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일종의 '너드'이면서도 지극히 모범적이고 무해한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그 반대편에 여고생 딸을 키우는 엄마이자 생활력 강한 캔디형 여성을 운명의 짝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애를 쓴다. 언젠가 한국영화에서 남녀가 바뀐 로맨스 코미디를 볼 수 있기를.
유해진은 인터뷰에서 <달짝지근해>와 같은 중소 규모 영화를 관객들이 응원해줘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20년 넘도록 영화계에서 활약해 온 그의 견해에 적극 공감한다. 영화계의 허리가 튼튼해야 관객들 또한 다양한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배우 유해진도 그랬다. 조단역에서 출발해 코미디 연기로 사랑받아왔고 연기 스펙트럼과 지평을 넓혀 왔다. 주연 캐릭터를 받쳐주는 역할부터 시작했기에 아예 극적인 사건 없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치호 같은 역할의 연기가 더 리얼하고 친숙할 수 있으리라.
조단역에서 출발해 스타가 된 수많은 배우들이 명멸해 가는 곳이 바로 스크린의 세계다. <달짝지근해>는 그런 세계에서 자유자재로 대중을 설득시키는 유해진의 은퇴가 아주 먼 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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