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거칠고 센 캐릭터도 공감하게 만드는 힘
'미쓰백'에서 상처 입은 외톨이와 구원자 모두 그려
"누군가 손 잡아준 기억 없는 여인, 천천히 위로 받아"
"외면하고 싶은데 신경 쓰이는 감정 보여주려 노력"
"그 틀 안에서 자신의 과거를 마주할 용기를 낸다"
영화 '미쓰백(2018)'에서 백상아(한지민)는 예사롭지 않다. 노랗게 탈색된 머리와 검은 가죽 재킷.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도 새어 나온다. 흐릿한 기운이 사라지면 표독스러운 눈초리가 드러난다. 살갗마저 철갑처럼 차고 딱딱해 냉혈 같다. 서글픈 운명의 낙인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학대받으며 구렁텅이로 빠져버렸다. 겨우 빠져나오지만, 외돌토리가 돼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다.
내면의 상흔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현재의 삶을 쥐고 흔들며 불안, 혼란, 짜증, 슬픈, 분노 등 감정을 건드린다. 백상아는 묵은 상처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자신을 똑 닮은 소녀를 만나면서 용기를 낸다. 현재의 삶으로 끌어와 화해하고 수용하고 용서하고 회복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아픈 영혼도 어루만진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다.
이지원 감독은 혈혈단신에서 구원자로 변하는 과정을 제법 세밀하게 표현한다. 백상아와 김지은(김시아)이 월미도에서 함께 바다를 보는 신이 대표적 예다. 김지은은 불현듯 털장갑을 낀 손으로 백상아의 맨손을 잡는다. 백상아는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인기척을 확인하며 어떻게 반응할지를 2~3초가량 고민한다. 수용을 망설이던 마음이 서서히 열리는 순간이다. 이 감독은 "단번에 무너지기보다 조금씩 틈이 벌어지길 바랐다"고 말했다.
한지민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티팩토리(T Factory)에서 진행된 SK브로드밴드 B tv 토크 콘서트 '필모톡'에서 "백상아는 누군가 슬며시 다가와 손을 잡아준 기억이 없는 여인"이라며 "강한 척하지만 외롭고 상처 많은 사람이기에 천천히 위로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지민은 미소를 보이지 않는다. 김지은을 한참 응시하다가 천천히 바다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내내 그윽한 빛을 유지해 맞잡은 손을 용기가 피어나는 계기로 승화시킨다.
일련의 연기는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가 주창한 개인심리학과 맞닿아있다. 그는 심리적 열등감을 '인간이 지닌 축복'이라고 규정했다. "인생은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낮은 것을 높이며, 미완성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연약하고 열등감을 가졌지만, 그것을 자신을 개발하는 원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 순간 열등감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잠재력이자 우리 속에 숨은 보석을 꺼내 우월로 가는 근원이자 에너지가 된다."
이 감독은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나는 순간마다 클로즈업 샷으로 접근했다. 한지민의 눈빛 변화에서 설파를 확신했다. "한없이 맑아 여리고 순수해 보이지만 때로는 한껏 날이 서 있다. 동물처럼 반짝일 때도 있고. 감정의 깊이를 종잇장 한 장 차이까지 보여줄 수 있었다."
백미는 백상아가 장섭(이희준)의 자가용을 타고 떠나다 불길한 기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내리는 신이다. 지나온 길을 역주행해 흐트러진 풀머리에 속옷 바람으로 실성해 있는 김지은을 발견하고는 꼭 안아준다. 한지민은 자가용에 탑승하기 전부터 언짢은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분명한 감정선은 자칫 불편한 기운으로 포괄될 수 있었다. 장섭이 이내 담담한 어조로 "어머니를 납골당에 모시고 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한지민은 관련한 속내를 눈빛으로만 표현한다. 초점이 살짝 나간 상태로 정면 아래를 빤히 응시한다. 슬며시 엿보이는 어머니에 관한 생각은 눈에 초점이 잡히면서 자연스럽게 현재를 환기한다. 초조함이 새어 나올 정도로 백상아와 김지은의 관계를 밀착해 이어지는 구원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한지민은 "외면하고 싶은데 신경이 쓰이는 감정을 계속 보여주려고 노력했다"면서 "그 틀 안에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제까지 뒤돌아보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할 용기를 낸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철저하게 응축돼온 감정이 김지은을 부둥켜안으며 복합적으로 파생된 이유다. 애초 이 감독이 한지민에게 요구한 이미지는 '두려운 짐승'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 내쉬어 안도와 불안이 교차하길 바랐다. 하지만 한지민은 시나리오에 없던 눈물을 더했다. 연기에 몰입해서 나온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는 "골목에 진입했는데 (김)시아가 내복만 입고 상처투성이로 서 있었다. 백상아의 어린 시절을 거울로 보는 듯해 눈물을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아들러는 "인간은 변할 수 있고,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면서 "그것을 위해 필요한 기운은 바로 용기"라고 강조했다. 한지민의 눈물은 그 가치에 맞닿으려는 절실한 마음과 같다. 관객을 차분히 설득하며 우리 사회의 아픈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이 감독은 "본래 백상아를 거칠고 센 여인으로만 설정했는데, 한지민의 여리고 순수한 마음이 더해져 대중과 공감할 지점이 생긴 듯하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한지민과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호흡을 맞춘 김혜자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당부했다. "자신을 갈기갈기 찢고, 다시 꿰매는 그런 역할도 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힘들고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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