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밖을 나서지 못하는 여자, 남자의 기발한 해결책
[조영준 기자]
▲ 영화 <내 방 안의 Another World>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01.
소희(강소연 분)는 집 밖을 나설 때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혹시나 집에 두고 온 것은 없는지, 에어컨이나 보일러를 켜놓고 나오지는 않았는지, 외출한 사이 집안에 누군가 들어오지는 않을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의 걱정이 멈추질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모두가 한 번쯤 겪어봤을 그런 상상이다. 하지만 매일 그런 상상 속에 걸음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그녀에게는 한없이 버거운 일이기만 하다. 그나마 현관문 앞 복도에서 생각이 떠오르는 날은 다행. 대부분은 언제나 아파트 건물을 한참 벗어나서야 들기 시작하고 소희는 그 자리를 계속해서 오가며 불안을 멈추지 못한다.
▲ 영화 <내 방 안의 Another World>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해. 너는 그 상상력이 쓸데없이 너무 부정적으로 발달한 게 문제야."
'내가 친한 언니가 있는데...'와 같이 타인을 가장한 말머리로 시작하는 고민의 무게는 다른 고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이런 접근의 어려움 앞에서 먼저 웃음을 터뜨리고 당사자를 비웃게 되고 마는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는 언니의 가면을 빌려 자신의 어려움을 꺼내고자 하는 이의 마음이 오히려 더 어렵고 불편할지도 모르는데. 반복되는 불안과 의심의 상상력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레 자신의 증상을 상담해 오는 소희에게 삼촌(이상홍 분)은 쓸데없이 부정적인 상상력이 문제라며 나무라는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정신과 의사라는 사람의 태도다. 평소 조카를 지켜본 결과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다만 영화는 그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와의 짧은 대화 이후에도 소희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기만 한다.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타인의 침입으로 인한 통제되지 않은 상황을 사전에 막기 위해 집안 곳곳의 물건에 박스 테이프를 붙여 놓는 건 예사다. 학교 수업에도 나가지 않기 시작하고, 친구와의 약속에도 늦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급기야 현관문을 열어 두는 것조차 힘들어 하기 시작한다. 한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의심은 점차 소희의 공간을 감싸 오르기 시작하고 그녀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금하기에 이른다.
03.
그런 소희에게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것이 기준(김현목 분)이라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자신의 유일한 친구로 설정되어 있는 그에게 (실제로 그가 아닌 다른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희는 삼촌에 이어 두 번째로 자신의 문제를 고백하고, 그는 그녀의 문제를 진심으로 함께 고민해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가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상황이 조금도 정돈되지 않고 매만져지지 않았음에도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제외하고는 어떤 부정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는 기준의 모습이다. 오히려 그는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훨씬 더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런 상황들조차 모두 자신보다는 소희를 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아직 온전한 해결책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처음의 단계를 마련하는 인물 역시 기준으로 설정한다. 그는 소희가 가지고 있는 불안의 시작점이 이 감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대상이 그 감정을 반복적으로 느끼게 되는 공간이라는 것에서부터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그러니까 지금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희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공간, 집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집', 그 공간의 공동(空洞)을 두려워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 영화 <내 방 안의 Another World>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너는 물고기가 왜 좋아?" 영화의 처음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수조 속의 물고기를 바라보는 소희에게 기준이 묻는다. "평생 물속에 있잖아. 물속은 조용하고." 소희의 대답이다. 그녀가 잠시 집을 떠나 있던 사이 기준은 집안을 온통 그녀가 사랑하는 공간의 모습을 바꿔놓는다. 이제 그 공간은 켜놓고 나왔는지 알 수 없었던 에어컨과 보일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을 두고 나왔는지 헷갈려하지 않아도 되고, 누가 침입해 들어올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된다. 소희의 말을 빌리자면 자꾸 없는 게 있는 것처럼 느껴질 필요가 없는 공간, 그렇게 느껴지더라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소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You've not crazy'. 소희의 문제를 대하는 기준의 모습을 통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꽤 명확하다. 타인의 불안과 어려움을 그저 하나의 현상과 개인의 유약함으로 치부하거나 미루어두지 않고 함께 걸음을 맞춰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는 태도다. 그리고 그런 삶의 모습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홀로 내던져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꽤 단단해지고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곤 하니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기준의 모습이 새삼 다시 보이는 것 같다. 누군가의 말을 오래 곱씹어 결정적인 순간에 떠올리고, 또 그 누군가가 지각을 할 때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대리 출석을 자처하고, 심지어는 집안을 모두 바꿔야 하는 노력을 들여 특별한 이벤트까지 해주는 일이 사실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내 방 안의 another world'에 약간의 로맨틱함을 섞어 생각하면 너무 멀리 다녀오는 게 되려나. 이 영화의 이면에 남겨두고 오게 되는 이면의 '긍정적인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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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열네 번째 큐레이션 ‘내일도 만날 너와 나’ 중 한 작품입니다. 오는 2023년 8월 30일까지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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