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비 오르면 밥에서 줄여야지" 서울 노인들의 잔혹한 현실
[김신애, 손민익 기자]
▲ 13일 서울 시내 한 버스에서 시민이 카드로 요금을 결제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서울 양천구 화곡동에 사는 탁양배(68)씨. 그는 지하철을 주로 이용한다. 버스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탄다. 하지만 지하철보다 버스를 타는 게 몸은 편하다. 지하철을 탈 때는 계단을 많이 오르내려야 해서 무릎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하철을 타는 이유는 '요금' 때문이다. 버스는 요금을 내지만 지하철은 만 65세가 넘어 공짜라서다. 그는 지난 12일 서울 버스요금이 일제히 올라서 지하철을 더 이용할 생각이라고 했다.
"돈 300원 오른 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이 들고 돈벌이하기 쉽지 않으니까 버스 대신 지하철 타야죠."
서울시 버스요금이 인상되면서, 고령층 이동권이 악화할 조짐을 보인다. 취재 결과, 요금 인상 부담이 커지자 무료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을 더 이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고령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하철은 계단·환승 이동 등의 이유로 고령층이 이용하기엔 불편한 교통수단이다. 더욱이 근처에 지하철역이 없어 버스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고령층은 비용부담을 줄이기 위해 외출마저 줄이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서울 버스요금이 인상된 첫날인 12일과 14·15일.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역 근처와 용산구 해방촌 그리고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실명 취재에 응한 8명의 고령자들을 만났다. 이들의 연령대는 64세에서 88세 사이로 60대 3명, 70대 3명, 80대 2명이었다.
▲ 서울시 양천구 신정 3동의 한 버스정류장에 요금 인상을 안내하는 설명이 붙어있다. |
ⓒ 김신애 |
서울시는 12일 새벽 3시부터 일반 카드 기준으로 시내버스 간선과 지선의 기본요금은 1500원(300원↑), 순환·차등은 1400원(300원↑), 마을버스는 1200원(300원↑), 광역버스는 3000원(700원↑), 심야버스는 2500원(350원↑)으로 올렸다. 2015년 6월에 오른 이후 8년 만이다.
버스요금이 오르자 버스 이용을 줄이겠다는 이는 탁씨뿐만이 아니다. 사회복지관에서 공공근로를 하는 최남식(88)씨는 오류2동에서 궁동복지관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공공근로로 27만 원을 벌고 기초연금으로 부부가 각각 25만8000원 정도를 받는 데 버스비가 올라 부담이 되면 버스 이용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평소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는 배태영(72)씨. 그가 버스를 타는 건 연신내 집에서 청량리 시장을 오갈 때다. 장 보고 무거운 것을 들고 지하철을 타며 걷는 게 힘들어서다. 연신내 불광동에서 공공근로로 27만 원, 기초연금 30만 원, 국민연금 약 40만 원을 받고 약값으로 한 달에 20만~30만 원을 지출하는 상황에서 1만 원가량인 한 달 버스비가 더 커지면 부담이다. 그는 앞으로 버스 대신 지하철을 더 이용할 수도 있겠다고 했다.
마포구 망원동 주민인 김혜선(66)씨는 얼마 전에 회사를 그만뒀는데 물가 인상에 더해 버스요금까지 오르니 버스 이용이 부담이라는 반응이다. 그래서 무료인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고, 마을버스 타는 구간은 걸어다닐 계획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삼청동에서 탑골공원을 오가는 임종무(84)씨. 요금이 인상되기 전엔 1000원씩 현금을 내고 마을버스를 탔다. 딸이 준 교통카드는 쓰지 않는 편이다. 버스에 탈 때와 내릴 때 두 번 카드를 찍는 것보다 탈 때 현금을 한 번만 내는 게 편하다는 이유였다. 지난 12일부터는 현금으로 1200원을 내야 해서 천 원 짜리 지폐 한 장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잔돈 내기가 번거로워서 몸이 불편해도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닌다고 했다.
▲ 서울 용산구 해방촌 오거리에서 버스들이 이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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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이용을 줄일 수 없어서 의식주 비용을 줄이겠다는 시민들도 있었다.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 사는 박덕순(72)씨.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을 정도로 허리가 아프다. 그는 "나 같이 허리 아픈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며 "해방촌 언덕을 걷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해방촌 주변엔 세탁소도 없어서 점퍼 하나 세탁소에 맡기려고 해도 버스를 타고 후암시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상된 요금 부담을 덜기 위해 아낄 수밖에 없는 건 식비다.
"물가가 오르면서 생선 한 마리가 밥상에 못 올라와. 버스비 오르면 또 밥에서 줄여야지."
지난 6월까지 경비원으로 일하다 잠깐 쉬고 있는 이형준(64)씨. 그는 일할 때 아침 일찍 일터에 도착해야 해서 버스를 탔다. 지하철은 버스보다 첫차 시간이 느려 현실적으로 이용이 어렵다. 일할 때는 무조건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65세가 되는 내년에도 일하게 되면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한다. 이씨는 "버스를 탈 수밖에 없다면 지출을 줄이기 위해 술 마시는 횟수를 줄이거나 더 저렴한 것을 먹을" 생각이다. "옷도 덜 사 입을 것 같다"고 했다.
따릉이와 알뜰교통카드가 적절한 대안일 수 없는 이유
버스요금을 줄이기 위한 대안으론 따릉이(서울시 공유자전거)를 타거나,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한 만큼 마일리지를 적립해주는 알뜰교통카드를 사용하는 방법들이 있다. 하지만 인상된 버스 요금 부담을 줄이기 위한 대안들은 고령층에겐 익숙하지 않은 방법들이다.
꽃이 좋아 시작한 꽃 장사를 종로 5가 혜화경찰서 앞에서 28년을 하며 두 아들을 대학 보낸 배태영(72)씨. "암수술 이후 나빠진 심장기능이 회복돼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며 활짝 웃는 배씨는 버스 비용이 부담이다. 그래도 차가 다니는 도로에선 사고가 날까 봐 따릉이를 타는 건 무서워서 엄두가 나지 않는단다.
▲ 신촌역 8번 출구에서 44m 떨어진 곳에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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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요금 인상에 부담을 느끼는 고령층이 생각하는 바람은 무엇일까. 미아동 주민 차인수(74)씨는 기초연금 30만 원과 국민연금 20만 원이 한 달 생활비 전부지만 미아동에 있는 집에 갈 때는 언덕을 올라가야 해서 미아역 전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탈 수밖에 없다.
"마을버스는 주로 노인들이 많이 타니까 마을버스 요금만이라도 올리지 않거나 나이 든 사람들은 마을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고령층은 시내에선 지선과 간선버스 대신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지하철역에서 거주지까지 거리가 멀거나 경사가 급해 걷기가 어려운 경우,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고령층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 외에도 배태영씨는 요즘 노인 인구가 많아지니까 적자를 고려했을 때 65세 이상 버스요금 무료는 어려워도 70세 이상 고령자로 연령 기준을 높여 지하철을 타기 어려운 고령층이 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인빈곤율 높은 나라에서 물가가 올랐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전용호 교수는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이 40%가 될 만큼 높은 상황에서 식비 등 전반적으로 물가가 올랐는데 교통비까지 오르면 노인들이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게 된다"면서 "집에만 있으면 활동량이 줄어들면서 신체적인 움직임이나 인지 능력이 떨어질 수 있고 우울감이 높아지면서 건강이 실제보다 더 빨리 나빠질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또한 "노인들에게 버스 요금은 단순히 교통비로만 보는 게 아니라 건강과 사회 참여, 인간관계 이런 전반적인 것들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외국의 경우, 교통과 관련된 것들도 재정 지원을 많이 해서 중요한 복지 수단으로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그런 생각이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고령층에 대한 교통비 지원이 국가의 재정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전 교수는 "교통비를 지원해서 노인들이 더 활동할 수 있게 하고 노인들의 건강이 좋아진다면 건강 보험에 들어가는 예산이 줄어들 수 있다"며 "노인들의 사회 참여를 가능케 하는 교통비 지원은 더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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