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미국을 바라보며 유럽으로 걸어가는 우리
관심은 높지만 신기술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체계적인 전략은 부족해 보여
대부분의 국가도 관련 산업에
대한 진흥 정책과 규제 위해
활발히 논의… EU와 미국의
법제도가 여타 국가에 큰 영향
국내의 법제도 정비에 EU의
폐쇄적·수동적 제도 벤치마킹
하는 건 모순… 기업의 창의적
혁신에 동기 부여할 틀 마련해야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챗GPT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이나 개념이 소개될 때마다 시장에는 광풍이 몰아친다. 서점에는 관련 서적이 넘쳐나고 각종 미디어는 관련 콘텐츠로 채워진다. ‘전문가’가 직업인 일부 전문가들은 신기술이 견인하는 장밋빛 미래를 소개하며 신기술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신드롬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정부는 뒤질세라 관련 산업 육성을 위해 인력 양성, 기술 개발 등을 위한 정책들을 쏟아내고 투자 계획을 서둘러 발표한다. 주식시장은 정부의 발표에 화답이라도 하듯 관련 종목이 연일 고공 행진을 거듭한다. 새로운 기술이 소개될 때마다 어김없이 반복되는 공식이다. 하지만 새로이 소개되는 또 다른 기술에 밀려 시장의 관심은 이내 시들해지고 관련 논의는 진부하게 여겨지기 일쑤다.
신기술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어느 국가보다 높지만 신기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체계적인 전략은 부족해 보인다. 신기술 신드롬에 편승해 이익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적 접근을 버리고 사회적·경제적 파급 효과의 체계적 분석을 기반으로 기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장기적 관점의 투자 전략이 마련돼야 한다. 정부의 역할도 직접 투자보다는 관련 시장의 성장을 위한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물론 기술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민간 투자를 견인하기 위한 정부의 선제적 투자도 필요하지만, 지속적으로 민간 투자를 활성화하고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시장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법제도의 정비가 더욱 절실해 보인다.
대부분의 국가도 유사한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챗GPT를 중심으로 생성형 인공지능(AI)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AI를 비롯해 신기술을 기반으로 시장에 출현하는 산업에 대한 진흥 정책과 규제를 마련하기 위해 각국은 활발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럽연합(EU)과 미국의 법제도가 여타 국가의 법제도 정비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은 기업의 자유와 창의성을 중시하고 신기술의 발전을 장려하기 위한 네거티브 규제 체계를 추구하고 있는 반면 EU는 ‘디지털시장법’ ‘디지털서비스법’ ‘인공지능법’ 등을 통해 사용자의 인권과 개인의 정보보호를 중시하고 기업의 독과점으로 인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포지티브 규제 체계를 추구하고 있다. 미국은 신기술로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자국 빅테크 기업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제도를 그려 나가고 있고, 유럽은 자국 시장에서 미국 기업들의 지배력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 시장을 살펴보면 관련 법제도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 초대되는 대부분 발제자는 관련 EU 법을 사례로 소개하면서 EU 법의 일부를 수정하고 보완해서 관련 법제도가 담아야 할 내용을 제시한다. 관련 부처의 공무원들도 EU 법을 관련 법 제정을 위한 중요한 자료로 삼고 있다. 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전문가들과 공무원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이 네거티브 규제 중심의 미국 법에는 사안별로 담겨 있지 않지만, 포지티브 규제 중심의 EU 법에는 자세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NIT신드롬’(선진국 또는 선진 기업에서 만들어지고 검증된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적 현상)이 지배하는 국내 시장에서 법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선진 국가의 관련 법을 벤치마킹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에 사고가 얽매이는 ‘활용적 편견’과 초기에 접하는 정보에 사고가 얽매이는 ‘고착적 편견’에 사로잡혀 사고의 출발점이 EU 법이 된다는 것이다.
경쟁력을 가진 자국 기업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나마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지배력을 제한함으로써 자국 시장을 보호해야 하는 EU와 우리의 상황은 다르다.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을 제외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 빅테크 기업으로부터 자국 기업들이 자국 시장을 지켜내고 있는 유일한 국가다.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 빅테크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국내 빅테크 기업이 출현하기를 기대하면서 미국 빅테크 기업으로부터 자국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EU의 폐쇄적이고 수동적인 제도를 벤치마킹하는 접근은 모순이다. 기업의 창의적 혁신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
박희준(연세대 교수·산업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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