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각목·노끈·헝겊
해충·탈수·화장실. 아이들이 머무는 동안 한국을 달궜던 단어들이다. 한국은 외국인에 대한 경계와 환대가 극심하게 교차한다. 스카우트 방문객들은 그냥 아이들이 아니었다. 거친 자연환경의 체험이 목적이라지만 한국에서는 모셔야 할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잼버리는 사소한 이벤트였다. 질문은 왜 새만금에 잼버리를 개최했느냐는 것이다. 그걸 캐묻다 보면 결국 새만금은 무엇이고 왜 필요했느냐는 질문에 이르게 된다. 그 문제를 만든 것은 여전한 그것, 정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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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잼버리로 부각된 새만금의 현실
다음 세대가 떠맡는 진퇴양난
‘일회용품’ 국토관이 만든 수렁
도시풍경마저 일회용품 현수막
」
공약. 그 목적은 실천이 아니고 당선이다. 짜릿하게 파고들어 화끈하게 승리하면 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이게 심사숙고의 결과물일 리가 없다. 새만금·행정수도·한반도대운하.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토건 공약 세 개를 꼽으면 이 이름들이 등장한다. 규모가 너무 커서 조성 성패 예측이 불가능한 사업들이다. 그래서 이런 초대형 토건 공약은 제시하는 게 아니고 내지르는 것이었다. 아니면 말고의 주술적 신념으로 밀고 나갈 뿐이다.
당선. 3대 토건 공약은 모두 큰 공헌을 했다. 불행은 당선이 아니고 이행 요구다. 새만금과 행정수도는 약세 지역 득표 공약이었다. 지역 입장에서는 자체예산 쓰지 않는 수혜 사업이라 거부할 이유가 없다. 소외와 차별 집단의 유일한 힘은 단결과 결속이다. 그래서 당선은 결국 공약 이행 요구라는 불퇴전의 맞수를 만나게 된다. 비교하자면 한반도 대운하는 전 국토 공약이었다. 반도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고 종단하는 운하라는 점에서 엽기적 공약이었다. 그런데 이건 공약 시행을 요구할 이해 결속 지역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슬금슬금 바뀌어 4대강 정비사업이 되었다.
공약 이행. 내가 번 돈을 쓰는 게 아닌데 정치인이 불신 비난 감수하며 공약을 번복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사업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들은 규모에 맞는 장기 사업이라 누구에게도 마무리 책임이 없다. 남는 문제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해결하리라 믿으면 된다.
진퇴양난과 대안 부재. 새만금에 신기루같이 다양하고 화려한 조감도들이 시대 따라 그려지고 나부끼다 맥없이 지워졌다. 그간 책임 소재도 없어졌고 진행도 방치도 해결 대안이 아니었다. 점점 사업이 정체 수렁에 빠져들었다. 각성제 같은 동력원이 새로 필요해졌고 잼버리라는 일회성 이벤트가 등장했다. 대상지가 오지에 평지이니 수만 명 야영에 적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잼버리를 통해 헛된 공약의 아물지 않는 상처를 선명히 목격한 것이다. 해결된 것은 없다. 새만금을 결국 어떤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느냐는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험지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야영장으로도 쓸 수 없는 흉지라는 이미지만 덧붙었을 뿐이다.
열망 표현과 의지 과시. 부안 읍내에 잼버리 유치기원의 현수막이 나붙던 시절이 있었다. 곧 그 현수막은 잼버리 유치확정 경축으로 문구를 바꿨다. 현수막은 새만금 공약 이행 요구부터 내내 글자만 바뀌며 나부끼던 도구였다. 부안뿐 아니고 지금 대한민국의 풍경을 규정하는 가장 익숙한 모습, 그것이 요지마다 나붙는 현수막들이다.
새만금과 현수막. 공통점 없어 보이는 이 둘을 이어보면 일관된 가치관이 드러난다. 국토 공간을 적당히 쓰고 버릴 일회용품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새만금과 현수막의 사이에는 그런 국토관의 사업들이 도열해 있다. 생명원이라는 강에 설치하는 보(洑)도 정당과 그 신념 따라 건설과 폐기가 오갔다. 원자력발전 사업도 삼겹살인지 취향 따라 뒤집히고 뒤집혔다. 실패 사업의 사례가 곳곳에 버젓한데 손바닥만 한 나라에서 공항을 더 못 만들어 안달들이다. 판단의 근거는 여전히 주술적 신념일 뿐이다. 내 돈 들지 않는 사업들이다. 이 사회가 새만금에서 배운 것이 여전히 아무것도 없더라는 증언들이다.
도박. 십만 원짜리 현수막으로 내지르는 소리로 당선도 되고, 수천억 원 국비 사업도 받아온다면 이건 눈앞의 잭팟이다. 바로 국토가 현수막 값만 판돈으로 내면 낄 수 있는 도박장이다. 모두 뛰어들어야 한다. 실패하면 반성이 아닌 비난으로 모면하면 된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국가가 내일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내일을 망가뜨리는 모습이 한번 쓰고 버릴 천 조각에 실려 나부낀다. 문제를 더해 만드는 그것, 여전히 한국 정치다. 정당마다 현수막에 괴담·성토·의혹의 아우성을 내지르니 전 도시가 오방색 아수라장이다.
현타. ‘현실인식 타임’이라는 걸 요즘 아이들이 줄여 부르는 단어다. 잼버리는 새만금에 옥토·산업·미래도시의 환상 아닌 해충·탈수·화장실의 현타를 남겨주었다. 잼버리 예산은 전북대학생 전학년 전액 장학금 2년 치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렇게 열흘 남짓 모셔온 아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각목·노끈·헝겊이 덕지덕지한 도시풍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들을 다시 모아 대한민국의 인상적 풍광을 묻는다면 답변은 이럴 것이다. 현수막이요.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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