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 소녀와 루이 암스트롱 '미친 무대'…걸그룹 선조들의 부활

나원정 2023. 8. 1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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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뮤지컬 '시스터즈' 박칼린 감독
내달 3일부터 대학로서 초연
박칼린 음악감독이 걸그룹 선조들을 부활시킨 쇼뮤지컬 '시스터즈'를 내달 3일부터 11월 12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초연한다. 사진 신시컴퍼니

“립싱크‧미디(전자악기)도 없던 시절의 ‘미친 무대’가 한국음악 역사를 열었어요. 그렇게 살아온 분들이 60‧70대에도 여전히 음악을 하고 있죠. 후배들이 세계적으로 판치는 때에 그런 선배들을 조명하고 싶었어요.”
뮤지컬 스타 박칼린(56) 음악감독이 K팝 걸그룹 선조들을 쇼 무대에 부활시켰다. 쇼 뮤지컬 ‘시스터즈(SheStars!)’가 다음달 3일부터 11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초연한다. 전수양 작가와 공동 극본을 맡아 S.E.S.와 핑클 등 1세대 아이돌보다 훨씬 앞선 80여년 전 걸그룹 역사를 불러냈다. 공연 연습이 한창인 9일 서울 청담동 녹음실 건물에서 만난 그는 "십수년 준비해온 숙원사업을 풀었다"며 활짝 웃었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 韓최초 걸그룹 프로듀서였죠


1935년 조선악극단 여성 단원으로 구성한 ‘저고리시스터’가 k팝 걸그룹의 최초다. 그 멤버이자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은 1953년 두 딸과 조카로 구성한 ‘김시스터즈’를 미국 진출까지 시키며 최초의 걸그룹 프로듀서가 됐다. 1960년대 국내에서 미니스커트를 제일 먼저 입은 윤복희의 ‘코리안 키튼즈’, ‘울릉도 트위스트’로 대박이 난 ‘이시스터즈’, 쌍둥이 2인조를 유행시킨 ‘바니걸스’, 인순이를 배출한 ‘희자매’ 등…. 쇼 뮤지컬 ‘시스터즈’엔 350개가 넘는 걸그룹 중 18인의 인생사가 10여곡의 히트곡과 함께 시대 순으로 교차한다. 금관악기 중심의 브라스 밴드가 당대 연주법을 되살렸다.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등장한 여성 가수 트리오 김시스터즈. 가수 이난영이 직접 프로듀싱한 첫 여성 그룹으로, 미국 진출 이후에도 여러 악기 연주 재능을 인정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중앙포토]
일제강점기 라디오 보급과 함께 출발한 가요 산업이 한국전쟁 중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베트남전과 함께 미군 베이스캠프가 이동하며 동남아 순회공연이 시작된 과정까지 되짚었다.

한국전쟁 판자촌 소녀, 루이 암스트롱 한무대에


이난영이 일제 순사들 앞에서 민요 ‘아리랑’을 섞어 부른 ‘처녀합창’이 첫 무대를 연다. 한국전쟁 중 판자촌에서 주린 배를 채우려 노래하기 시작했던 윤복희는 루이 암스트롱‧밥 호프 등 미국 유명인사와 공연하는 ‘한류 스타’가 된다. 김시스터즈의 ‘유 아 마이 선샤인(You Are My Sunshine)’을 라디오로 듣던 수도여고 3학년 김명자(김희선으로 개명)는 오디션을 통해 ‘이시스터즈’로 데뷔하고, 이들의 ‘울릉도 트위스트’에 맞춰 춤추던 어린 김인순(인순이)은 훗날 ‘희자매’를 결성한다. 남다른 혼혈 외모 탓에 수녀원에 숨어 살려던 그가 음악으로 꽃 피운 삶의 여정은 커버곡 ‘거위의 꿈’에 담았다.
쌍둥이 자매 고재숙, 고정숙 2인조로 결성한 '바니걸스' 1970년대 활동 모습이다. [중앙포토]
박 감독은 “음악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돈 내면 되는데 선생님들의 스토리를 함부로 쓸 순 없었다. 돌아가신 분 빼곤 다 직접 만나뵀다”면서 "이 프로젝트를 미리 알고 있던 윤복희 선생님은 ‘왜 찾아왔어. 그냥 (뮤지컬 공연) 해’ 하셨지만, 나머지 분들은 전화번호 구하는 것부터 난제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시스터즈’ 김희선 선생님은 연락했더니 컬러링이 ‘워싱턴 광장’(이시스터즈 히트곡)이었다. 미국에 있는 ‘김시스터즈’ 김숙자 선생님은 그분의 이야기로 여러 작품 제안이 있었는데 저희가 어렵게 허락받았다"고 했다.
“고재숙 선생님은 같이 ‘바니걸스’ 활동했던 쌍둥이 언니(고정숙, 1955~2016) 얘기하며 우셨어요. 대중에게 잊힌 채로 먼저 떠난 걸 슬퍼하신 거죠. 대부분 한국음악 역사의 일부로 자신의 이야기를 뮤지컬 무대에 올린다는 제안을 반겨주셨습니다.”
박 감독은 "본인들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분들께 ‘Live Again, 음악으로 다시 사시라’란 말을 많이 했다"고 덧붙였다.

박칼린 "그분들 삶이 결국 우리 얘기"


그는 “공연 연습하다가도 ‘쌤, 그때 오디션 뭐 입고 가셨어요’ 하며 수시로 전화드렸다”면서 "그 과정이 재밌고 즐거웠고, 또 매번 울컥했다. 연주자들도 눈물을 글썽였다"고 했다. "그분들 스토리가 결국 지금 우리(뮤지컬‧음악 종사자) 얘기이기 때문"이라면서다.
‘시스터즈’는 특정 걸그룹이 아닌, 무대 위의 삶 자체가 주제다. 등장 걸그룹은 음악 역사상 두드러진 장면을 되짚어가며 선별했다. 공연마다 7명의 배우가 여러 배역을 맡는 방식을 택했다. 유연‧신의정‧김려원‧선민‧하유진‧이예은‧정유지‧정연‧이서영‧홍서영이 여러 여가수 역을 바꿔가며 한다. 남배우론 황성현이 해설자 겸 멀티맨으로 출연한다.
1970년대 활동한 '희자매'. 가운데가 훗날 솔로로 독립한 가수 인순이다. [중앙포토]
선곡도 드라마가 먼저였다고 한다. 박 감독은 “'이시스터즈'는 여러 히트곡 중에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곡을, '코리안 키튼즈'는 누구도 못 따라갈 에너지를 발산했던 공연 장면 위주로 썼다”면서 “음악 자체보다 그분들 역사를 따져 골랐다”고 설명했다. 극 중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나간 걸그룹 역사는 현재까지 다다른다. 올해 66세인 인순이는 99번째 뮤지컬 무대에 서고, 77세 윤복희는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다.
박 감독은 “한국 현대사 사건들 속에 어떤 음악이 있었고, 어떤 가수들이 있었는지 기리고 싶었다”면서 “한명의 슈퍼스타가 아닌 무대 위의 삶, 동료애가 중요했다. 출연 배우들도 선배들이 이어온 거대한 역사 속에 자신들도 놓여있다는 걸 느끼길 바랐다”고 밝혔다.

외국 소재 韓창작뮤지컬 폭포 속에 전통 발굴


1960년대 7년간 미국, 유럽 순회공연에 나서는 윤복희(왼쪽부터), 유주용 부부 모습이다. [중앙포토]
‘시스터즈’는 최근 한국 창작 뮤지컬 소재로 서구 역사‧인물이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등장한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다. 박 감독은 “1920년대 이후 한국을 다룬 외국 자료들을 뒤졌다. 신민요부터 한국음악 역사와 변천사를 조사한 미국 논문이 있더라. 일본이 미국 라디오를 베껴 조선에 내다 판 당시 기록도 들여다봤다”고 했다. 서울대 대학원 음악과에서 국악 작곡을 전공한 그가 음악감독을 맡은 첫 뮤지컬은 ‘명성황후’였다.
한국‧리투아니아계 미국인인 자신을 가리키며 “이렇게 생긴 사람이 한국 소재 작품을 하고, 한국 사람들은 외국 소재 작품을 한다”고 농담 반 운을 뗀 그는 “지금 한국 관객에게 뭐가 필요한지 생각해서 작품을 하진 않는다. 창작자는 이기적이다. 내 삶에 꽂히는 뭔가에 눈이 확 뜨인다”고 했다.
“한국 5000년 역사 속 소재가 뮤지컬 본고장인 미국 브로드웨이보다 훨씬 많죠. 차기작은 한국 종이접기와 무속 세습, 강신무속을 다룹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한 무대인데, 한지 종이접기로 덮인 무대를 보게 될 겁니다."
쇼뮤지컬 '시스터즈' 포스터. 사진 신시컴퍼니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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