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의 두 얼굴

이준목 2023. 8. 1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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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21세기 혁신의 아이콘' 스티븐 폴 잡스(Steven Paul Jobs, 1955-2011)를 대표하는 수식어다. 전세계 기업가치 1위인 애플(Apple)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를 개척하고, 스마트폰(아이폰.iPhone) 개발을 이용하여 전 세계인의 삶을 바꿔놓은 인물이기도 한다.

누구보다 시대를 앞서간 잡스의 창의적인 발상과 행보는 그를 'IT업계의 아이돌'이자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혁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인성적인 면에서는 비정한 워커홀릭이자, 철저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냉혈한이었다는 상반된 평가도 공존한다. 과연 잡스의 진짜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8월 1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2회에서는 '비정한 워커홀릭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혁신이 되었나'편을 통하여, 잡스의 일대기와 그가 현대 사회에 남긴  유산을 조명했다. 미국사 전문가인 김봉중 전남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리아계 이민자였던 아버지 존 잔달리와 미국인 어머니 조앤 시블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미 외가 쪽에서 종교와 인종의 문제로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잔달리와 헤어져야했던 조앤은 부모님 몰래 홀로 잡스를 출산한 이후 입양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앤은 당초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 부부를 양부모로 원했지만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기 어려웠고, 결국 기계공과 경리 출신이던 폴 라인홀트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다행히 잡스는 양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개방적인 양부모의 성격 때문에 자신이 입양아 출신이라는 것도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양부모는 친부모에 버림받았다는 놀림을 듣고 충격에 빠진 잡스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가 널 특별히 선택한 거란다"라는 이야기를 천천히 반복해서 들려줬다고 한다. 훗날 잡스는 이 일화를 회상하며 "양부모님은 진짜 1000% 나의 부모님이었다"며 깊은 애착과 존경심을 드러냈다.

잡스는 기계공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기계를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잡스는 똑똑하다고 인정받은 것과는 별개로, 학업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말썽꾸러기로 자랐다. 중학교에 진학하고도 방황을 거듭하던 잡스는 양부모에게 전학을 가고싶다고 요청했다. 그렇게 잡스 가족이 이사한 샌프란시스코 남부 일대는, 마침 미국을 대표하는 첨단산업단지인 실리콘밸리가 자리잡아가던 시기였다.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대거 몰려든 도시에서 호기심많은 10대 시절을 보내며 훗날 잡스는 "실리콘밸리라는 장소와 그 시대에 정확히 내가 있었던 것은 놀라운 행운"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방황 거듭하던 젊은 시절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젊은 시절의 잡스는 1960-70년대 시대 미국의 많은 청춘들처럼 '히피(Hippie 혹은 Hippy) 문화'와 동양철학 등에 심취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잡스는 친구들과 마약에 빠지기도 하고, 대학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만에 자퇴하는 등 방황을 거듭했다.

1974년, 19세의 잡스는 전도유망한 비디오 게임회사였던 '아타르'에 입사하며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아타르의 창업자인 놀란 부쉬넬은 여전히 히피문화에 심취하여 기행을 거듭하고 동료 직원들도 기피하던 잡스를 과감히 채용하고 그가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부쉬넬은 남들이 2-3개월 걸린다던 프로젝트를 일주일만에 해낼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잡스의 독특함에 흥미를 느꼈고 "그가 다루기 힘들었지만 마음에 들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잡스의 인생에서 평생의 동반자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훗날 애플의 공동 창업자가 되는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인물이다. 잡스가 16세일 때 두 사람은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잡스는 당시 첨단분야였던 컴퓨터에 능통한 워즈니악을 보고 '자신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처음 본다'며 감탄했으며 그를 통하여 컴퓨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잡스는 회사로부터 1인용 게임을 제작해보라는 미션을 부여받았고, 워즈니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놀랍게도 워즈니악은 실제로 3일 만에 게임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이후 1인용 게임 분야에서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킨 '벽돌깨기(Break out)'다. 

그런데 잡스는 회사에서 개발 보상금으로 무려 5천달러 이상을 받았음에도, 정작 진짜 개발자인 워즈니악에게는 액수를 속이고 10분의 1도 안되는 소액만 지급했다고 한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워즈니악이 따져묻자 잡스는 '기억이 안난다'고 둘러댔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1976년, 각자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21살의 잡스와 26살의 워즈니악은 의기투합하여 '애플'을 창립한다. 잡스는 워즈니악이 개발한 컴퓨터 '애플 원'을 보고 미래 산업으로서 컴퓨터 사업의 비전을 확신하고 함께 창업을 제안한다. 워즈니악이 컴퓨터 개발에 특화된 기술자였다면, 잡스는 당시 소수의 마니아층에게만 알려져 있던 컴퓨터 분야를 대중의 관심을 끌수있는 개인용 컴퓨터 개발이라는, 사업가적인 선견지명이 있었다. 

1977년에 출시한 '애플2'는 키보드와 본체가 결합된 일체형과, 그래픽-컬러 영상 모니터 출력 지원 등에서 오늘날의 컴퓨터에 가까운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잡스는 여기어 홍보와 영업을 맡아 제품 내 게임 설치와 로고변경, 시중보다 저렴한 가성비 전략 등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컬러풀한 사과를 한 입 베어문' 형태로 유명한 2대 애플 로고(1977년-1998년)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애플2는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고 애플은 창업 5년만에 자산가치 2억 5천 6백달러(현재 2조 850억 추정)에 이르는 거대 IT기업으로 성장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일약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라이징스타이자 영앤 리치의 상징으로 거듭난 것이다.

하지만 잡스와 애플의 독주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세계 최대의 컴퓨터업체이자 애플의 강력한 라이벌이 된 IBM의 등장 때문이었다. 1981년대들어 IBM이 선보인 '5150'은 애플과 당시 타사 제품과도 소프트-하드웨어 호환이 가능하다는 차별화되던 장점을 앞세워 출시 2년 만에 75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선풍을 일으켰다.

잡스는 처음에는 IBM의 등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경쟁자의 등장을 환영한다는 광고까지 내걸며 여유만만했다. 하지만 막상 오래 가지 않아 IBM에 밀려 2인자로 전락할 위기에 놓이자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고, 뉴욕 여행중 IBM 본사 로고 앞에서 '손가락 욕'을 하는 사진을 찍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잡스는 IBM를 능가하는 최고의 컴퓨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매킨도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를 위하여 직원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잡스는 직원들에게 야근과 새벽 회의를 강요하고 마음에 들지않으면 수시로 폭언도 불사했다고 한다. 보다못한 회사가 잡스의 컴퓨터 개발을 중단시키고 보직을 이동시켰지만, 잡스는 오히려 이동한 부서의 팀장을 쫓아내고 자신이 원하는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할만큼 고집불통에 독불장군이었다.

1984년 잡스의 야심작이었던 '세상에 없는 컴퓨터' 매킨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잡스는 홍보를 위하여 당시로서는 헐리우드의 거장 영화감독이던 리들리 스콧에게 광고 제작을 의뢰하며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하기도 했다.

매킨토시는 역사적으로 컴퓨터에서 마우스 시대의 도래, 서체의 다양화 등으로 개인용 컴퓨터 기술 혁신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정작 잡스의 기대 만큼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잡스는 완벽한 컴퓨터라고 자부했던 매킨토시에 다른 컴퓨터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매킨토시 고유의 프로그램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 호환성이 떨어졌다. 일반인 소비자들에게는 실용성이 떨어진 반면, 가격은 지나치게 비쌌다. 잡스 특유의 과도한 독선과 완벽주의가 오히려 제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린 독이 된 사례다.

이미 잡스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애플 이사회는 매킨토시 판매부진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1985년 결국 잡스를 회장직에서 해고하기로 결정한다. 30세의 잡스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잡스는 훗날 한 대학연설에서 "삶의 초점을 모두 잃어버렸고 참담한 심정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절치부심의 시기를 거친 잡스는 'NeXT'라는 새로운 컴퓨터 회사를 창업하고 또다른 도전에 나선다. 사실 초기에도 회사의 행보는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하지만 설립 1년만인 1986년 잡스가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의 부수적인 일환으로, 3D편집과 특수효과 기술력을 보유한 영화 그래픽 회사였던 '루카스 필름'를 인수한 것이 뜻하지않은 전화위복을 불러온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세계적인 컴퓨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불리우는 '픽사(PIXAR)'의 전신이다.

훗날 잡스는 "컴퓨터 그래픽에 큰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정말로 이 회사를 사고 싶었다. 루카스 필름의 사람들을 봤을 때 그들이 예술과 기술을 결합하는 일에서 남들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물론 잡스가 픽사 인수와 설립이 불러올 효과를 처음부터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픽사가 1990년대부터 제작한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세계 최초의 3D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꼽히며 전세계에서 3억 6200만달러(현재 9923억 추정)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는 한때 벼랑 끝까지 몰렸던 잡스가 다시 유능한 사업가이자 컴퓨터 개발자로 재기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1997년, 잡스를 내쳤던 애플이 놀랍게도 12년 만에 그의 복귀를 요청한다. 당시 애플은 잡스가 떠난 이후에도 부진을 면치 못하며 파산위기까지 몰려있었다. 결국 애플은 NeXT사를 인수하고 잡스를 다시 임시 CEO으로 추대하는 방식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잡스는 애플의 복귀 제안을 처음 듣고 "인생 참 돌고도는 구나(What a circle of life)"라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잡스는 애플에 복귀하고 컴퓨터 개발 기술을 제공하는 대가로 연봉을 거의 받지않는 대신, 1억 2천만달러의 현금과 애플 주식 3억 7천만 달러를 받았다. 잡스는 당시 '썩은 사과'로 불리며 조롱받던 애플을 혁신한다는 명분으로 불필요한 사업과 제품들을을 정리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3천명 이상의 직원들을 해고했다.

당시 애플의 직원들은 엘리베이터에서 잡스를 마주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잡스가 돌발적으로 회사와 업무에 대한 각종 질문을 던지고 마음에 들지않는 대답을 한 직원들을 곧바로 해고 통보를 날렸기 때문이라는 일화도 전한다.

능력과 별개로, 사실 잡스의 '인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어두운 일화들이 전해진다. 공동 창업자이자 은인이었던 워즈니악 조차 "스티브 잡스에게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무자비하고 사람들을 나쁘게 대했다는 것이다.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어쩌면 사람이 저런 짓을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 자식은 절대 저렇게 키우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고 저격한 바 있다.

또한 잡스의 대표적인 라이벌이자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잡스같은 개자식(Asshole)을 흉내내는 것은 쉽다"고 독설을 날리기도 했으며, 기업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게리 베이너척은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많은 사람들은 비열하게 회사를 운영한다. 바로 스티브 잡스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의 방식이 옳다고 따라하는 것"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잡스는 본인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친절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극히 무례했다고 한다. 심지어 직원을 면접하는 자리에서도 사생활에 관한 선을 넘는 질문을 쏟아내거나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밖에도 부적절한 관계로 혼외딸이 있었음에도 그 존재를 부정하는가 하면, 장애인 주차구역에 무단으로 주차해놓고 벌금을 내지 않으려고 번호판을 달지 않았다는 등 비열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도 전해진다.

혁신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그럼에도 잡스는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애플의 부활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오늘날 혁신의 상징적인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잡스가 애플 복귀 이후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브랜딩'이었다. 잡스는 경쟁사인 IBM의 슬로건인 'Think'를 응용하여, "자신이 세상을 바꿀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Think different(다르게 생각하라)'라는 슬로건과 광고를 선보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슬로건은 잡스 본인의 천재성에 대한 과시욕과, 경쟁사에 대한 콤플렉스가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해석된다. 'Think different'라는 메시지는 오늘날 제품을 넘어 애플 회사와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을 상징하는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잡스는 애플 복귀 이후 1년만인 1998년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검정 터틀넥-청바지-운동화 패션을 고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또다른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있는데, 잡스는 직원들에게 단결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일한 유니폼을 입을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고 한다. 평소 그렇게 다양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던 잡스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일화다.

아쉬워하는 잡스에게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너만의 유니폼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여 수백장의 검정 터틀넥을 만들어준 것이 오늘날 잡스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잡스의 패션은, 그의 지적인 이미지와 함께 애플이 '단순하고 합리적인 브랜드'라는 것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하는 뜻밖의 효과를 불러왔다.

잡스의 두 번째 혁신은 '아이팟(휴대용 음악기기)'의 탄생이었다. 히피 출신답게 젊은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잡스는 작은 기기안에 많은 음악을 담을 수 있는 방법를 생각해왔고, 일본 여행을 하다가 휴대용 플레이어를 들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에서 우연히 영감을 얻어 아이팟 개발이라는 아이디어를 시작하게 됐다.

아이팟은 음악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워크맨 시대를 벗어나 MP3 시대를 맞이하여 카세트나 CD에서 디지털 기기 위주로 음악 소비의 수단이 달라졌고, 아이팟과 함께 음악서비스 스토어인 '아이튠즈'가 등장은, 저렴한 가격으로 언제든 원하는 노래를 인터넷으로 다운로드받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잡스하면 당연히 컴퓨터 개발만 생각했던 많은 대중들의 허를 찌른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잡스는 "애플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제품이 있다면 바로 아이팟"이라고 할만큼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잡스의 마지막 혁신은,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스마트폰'의 개발이었다. 2007년 아이팟, 휴대전화, 인터넷 통신기기의 기능이 모두 결합된 '세상에 없던 아이폰'의 등장은, 오늘날 디지털-모바일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얇고 심플하고 가벼운 디자인, 키보드가 따로 필요없는 터치스크린, 배터리 분리와 교체 없는 일체형 배터리, 컴퓨터에서만 가능한 기능들을 휴대전화에서 가능하게 한 각종 애플리케이션(앱) 과 이모티콘 기술 등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중에서도 SNS(소셜미디어서비스) 기능은 모바일을 통한 전세계적인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시대를 열며 선풍적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아이폰으로 시작되어 스마트폰 전성시대와 확장된 팬덤 문화는 세대, 국경, 이념을 초월하여 세계인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첨단 기계문명의 시대에 기계와 인간의 감성적 교감이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잡스가 인류에게 남긴 최대의 유산으로 꼽힌다. 잡스는 이를 두고 '우리는 기술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기술에 인문학과 인간성을 결혼시켰다. 기술과 인문학이 만나니 비로소 고객의 심장이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잡스는 2010년에는 아이패드를 선보이며 발전과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애플은 전세계 시가 총액 1위를 차지하며 IT기업의 상징으로 굳건하게 자리매김했다.

수많은 역경을 헤쳐왔던 잡스가 유일하게 극복하지 못한 것은 건강이었다. 잡스는 2003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고, 긴 투병 끝에 2011년 불과 56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잡스는 건강이 악화되던 상황에서도 죽기 직전까지 새로운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할만큼 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하라. 현실에 안주하지마라.(Stay hungry, stay foolish)"

잡스가 우리에게 남긴 궁극적인 유산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혁신 자체보다는, 불굴의 의지와 도전정신이다. 바로 '인간 정신에 대한 확신'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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