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을 지켜 온 정원사 사부의 화장실 철학 [일본정원사 입문기]
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 한국 제자의 이야기. <기자말>
[유신준 기자]
전날 점심은 우동이었다. 나는 가리는 게 없어 점심은 대체로 사부 식성에 따르고 있다. 저녁은 좀 얼큰한 게 먹고 싶었다. 신김치 넣고 낫토 남은 걸 때려넣고 국적 불명의 라면을 끓였다. 낫토와 김치의 조합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천상궁합이다. 혹시 기회가 되면 시험 삼아 낫토에 김치국물 넣고 비벼 보시라. 맛 끝내준다.
낫토를 끓인 건 처음이었다. 천상궁합이 끓인다고 달라지랴. 믿고 끓였다. 역시 낫토김치 조합은 끝까지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입맛 당기는 대로 남은 찬밥까지 말아서 싫컷 먹었더니 그만 과식을 해버렸다. 화장실 금지규정에 잘 적응하는 중이었는데 돌발 변수가 생겼다.
▲ 나는 가리는 게 없어 점심은 대체로 사부 식성에 따르고 있다. |
ⓒ 유신준 |
과식은 적응된 몸을 흔들어 놨다. 일하는 동안 화장실이 계속 신경 쓰였다. 사부의 작업준비 지침을 기억하시는가. 아침 먹고 화장실 다녀와서, 물까지 챙겨 올 것! 아침은 꼭두새벽이라 어차피 안 들어간다.
마실 물은 새참도 나오고 점심 때까지 그다지 신경 안 써도 된다. 단 한 가지 신경쓰이는 게 있다면 화장실이다. 나는 가급적 사부의 방침에 따르려 한다. 가급적이란 단서는 화장실이 생리현상이라는 조건 때문이다. 생리현상이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인간의 내부구조가 신축적이긴 하다. 지난밤 투입이 좀 과했다 해도 그 정도는 견뎌 줄 걸로 생각하고 출근했다. 견뎌주지 못한다고 출근 전 화장실에 줄창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엎친 데 덮친다던가. 출장지에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발변수가 이어졌다. 맘씨고운 정원 주인이 출근하자마자 냉녹차와 입가심 간식을 내왔다. 여태까지 출근하자마자 들이미는 일은 없었는데. 먹어야지 어쩌나. 일단 먹었다.
전날 하던 흑송 꼭대기에 올라가서 일을 막 시작하려는데 사부가 부른다. 이웃집에서 수고하신다고 커피를 또 가져 왔단다. "내려와라. 먹는 것도 일이야."
인심도 넉넉하시지. 얼음을 넣은 커피가 커다란 머그컵 가득이다. 나는 원래 카페인 민감성 체질이라 커피를 잘 못 마신다. 현장에서 다져진 몸이니 아침 커피 한 잔 정도야 어떠랴 했다. 두 잔째 얼음 머그컵이 신경 쓰이는 거다. 이것이 뱃속에 들어가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다. 비상사태다.
▲ 출근하자마자 냉녹차와 입가심 간식을 내왔다 |
ⓒ 유신준 |
사부의 화장실 원칙을 지켜야 한다
흑송 꼭대기로 올라가는 몸짓이 조심스러워졌다. 나무 위에서 다람쥐처럼 재빨랐던 움직임도 눈에 띄게 둔해졌다. 조심조심. 어떻게든 불상사 없이 이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여태까지 재미있는 일거리였던 흑송 나무가지들이 이제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직 우려할 만한 정도는 아니나 이전 컨디션이 아니다. 전전긍긍.
맘씨 좋은 정원 주인이 미리 화장실 위치를 가르쳐주긴 했다. 그렇다고 사부의 금기를 깰 수는 없다. 사부방침에 따르면 정원주 화장실을 사용하는 건 정원사의 매너 위반이다. 일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거다. 평생을 정원에 몸바쳐 온 사부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불문율같은 거다. 내가 화장실을 가면 사부 체면 구기는 거다. 제자인 내가 필사적으로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점심 먹을 때까지 몸이 잘 버텨줬다. 금지 규정을 잘 지켰다. 신경 쓰이는 일도 작업에 몰입하다 보면 대개 잊힌다. 몰입의 좋은 점이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부터 찾긴 했다.
사부는 정원주 화장실은 꺼리지만 식당 화장실은 예외다. 사부가 그러하니 나도 그래야 한다. 사람의 내장기관들은 대표적인 불수의근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는 그걸 수의근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최초의 정원사들이다. 인간은 위대하다.
▲ 흑송 작업요령은 어제 이미 터득했겠다, 오늘은 터득한 요령을 실험하는 날이다 |
ⓒ 유신준 |
전철을 타면 프로그램된 인조인간처럼 일제히 스마트폰에 코박는 초 드라이한 세상 아닌가. 50년을 함께하다 보면 이정도 다정한 인간 관계쯤이야 기본으로 만들어지는 건가.
기본 아니다. 사람이 어디 함께 한 세월만으로 그렇게 가까워지던가. 평생을 살고도 돌아서는 황혼이혼이 흔한 세상에. 이 사람들 알고보면 지독히 아날로그한 사람들이다. 이웃사람 만나면 서서 한 시간 소통은 기본이다.
아직 사람의 온기에 기대어 살고 있는 거다. 이 바쁜 세상에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이런 진기한 풍경은 사람 냄새 나는 인간 관계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옆집에서 정원 손질 한다고 커피 타서 가져 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오후에도 사다리 없는 소나무 작업은 계속됐다. 5미터쯤 될까. 비가 와서 미끄럽다(이 양반은 주로 위험한 일만 나를 시킨다니까!!). 다행히 나는 평소 나무를 잘 타는 편이다. 이까짓 것 가지가 튼튼한 소나무 정도는 껌이다.
흑송 작업 요령은 이미 터득했겠다, 오늘은 터득한 요령을 실험하는 날이다. 솔잎을 마음껏 덜어내는 거다. 어디까지? 그렇게 다 없애면 어떻게 하냐고 사부가 꾸중할 때까지. 어차피 나한테 맡겼으니까 내 맘대로 하는 거다.
수고를 한번에 보상 받는 기분
작전은 주효했다. 내가 손질한 이파리가 사부 가지보다 현저하게 적은 데도 별 말씀이 없으시다. 네가 나를 앞지르면 일을 그만둬야지 어쩌겠냐고 배수진까지 치신다. 어떻게 60년을 앞지르겠냐고요... 그런 일은 죽어도 없을 거라고 했지만 사부가 슬그머니 내 솜씨를 인정한 건 사실이다.
내심 뿌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오전 중에도 흑송 손질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지도 네 마음껏 정리해 보라셔서 뭉텅뭉텅 잘라내 버렸다. 예술품처럼 잘 다듬어 놓은 가지들을 자르려니 캥기는 구석도 있었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냥 뚝뚝 잘라냈다. 초짜의 만용.
마침내 터득한 요령은 이거다. 윗쪽은 가볍게 아랫쪽은 묵직하게 다듬되 전체적으로 균일한 밀도를 미묘하게 유지해야 한다. 자연스런 배열이 최대 관건이다. 조금이라도 무거워 보이는 곳은 사부가 반드시 지적했으니까. 일본 정원사의 톱 클라스인 교토 정원사들이 추구하는 정원 손질법이 '손대지 않은 것'처럼 손대는 거라던가.
위쪽을 끝내고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이곳은 아래쪽이니 좀 두텁게 해야 전체적인 균형이 유지된다면서 이제부터는 가지를 아끼란다. 아끼라는 건 이제부터 맘대로 못 자른다는 뜻이다. 신경이 쓰이니 속도가 갑자기 줄었다. 탄력받은 대로라면 쉽게 끝날 것 같던 일이 결국 2시 반까지 작업시간을 꼬박 채웠다.
현장 일의 최대 장점은 결과를 즉시 확인할 수 있다는 거다. 청소까지 마치고 정원을 돌아보는데 작업 결과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손질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이쁘다. 정원사의 최대 즐거움이다. 힘들었던 과정의 수고를 한방에 보상받는다. '키레이니낫다네'(깔끔해졌구나) 사부의 작업종료 선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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