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사람 손닿을 일 없죠"…한은 새 금고에 '범죄의 재구성'은 없다

김효숙 2023. 8. 1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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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로 대체된 중앙은행 '심장부'
"현금 나갑니다" 지시는 전산망에서
돈다발 수송도 지게차 대신 로봇이
이제야 마음 편히 즐길 케이퍼 무비
영화 '범죄의 재구성' 속 시중은행 직원을 가장한 사기꾼들이 한국은행 금고에서 현금을 담고 있다. ⓒ범죄의 재구성 캡처

"장소를 안 물어보시네. 한국은행인데." - 2004년 영화 '범죄의 재구성' 중

한국은행도 은행 강도의 표적이 될 수 있을까. 길었던 셋방살이를 마치고 최근 서울 남대문로 본부로 돌아온 한은이 답을 내놨다. 비장의 무기는 역시나 디지털과 로봇이다. 21세기 사회의 변화를 주도해 온 최첨단 기술은 우리나라의 심장부 제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한은 금고까지 업그레이드시켰다.

새 단장을 마친 한은 금고는 더 이상 영화에서 봤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주인공들의 수법 하나 하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차가운 기술의 결정체가 똘똘 뭉쳐 있었다. 범죄의 재구성의 기억은 이제 케이퍼 무비의 상상력으로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추억의 단면이 됐다.

1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부 화폐수납장에서 자동화금고시스템이 시연되고 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오만원권이 자동검수기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장면1) 사기꾼 5명이 시중은행 직원인 척 한은 수원본부에 접근한다. 이들은 위조한 당좌수표를 제시하고 한은 발권국은 이를 통과시킨다.

돈을 훔치려는 일당이 한은 직원을 만나는 이 장면부터 현실에서는 삭제됐다. 한은 직원 개인이 대면 확인만을 근거로 금고 문을 열도록 결정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꺼운 철문 속 화폐의 입·출고 지시가 모두 보이지 않는 전산망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한은이 16일 공개한 자동화 시스템은 금고 내 화폐의 입출고 지시와 재고 관리를 모두 통합 전산망으로 합쳤다. 한은 발권국은 본부 재입주와 함께 지난 8일부터 이같은 자동화금고시스템을 활용해 화폐 관리 업무를 재개한 상태다.

1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부 화폐수납장에서 자동검수기가 돈 포대를 확인하고 있다. ⓒ뉴시스

◆장면2) 사기꾼 5명이 시중은행 직원인 척 한은 수원본부에 접근한다. 이들은 위조한 당좌수표를 제시하고 한은 발권국은 이를 통과시킨다. 금고 문을 열리고 일당은 마침내 산처럼 쌓인 현금 다발을 마주한다. 짐수레에 돈을 쌓고 또 쌓고, 그렇게 50억원을 털었다.

한은의 새로운 금고에서 절대 벌어질 수 없는 광경이다. 현금을 들고, 쌓고, 옮기는 모든 과정은 이제 모두 무인 로봇들이 몫이다. 설사 외부인 누군가 한은 발권국에 발을 딛는 데까진 성공했더라도 소위 돈을 들고 튈 일말의 여지는 원천 차단된 셈이다.

이날 오후 한은 자동화 금고 시스템 시연이 진행된 본관 1층 화폐 수납장에는 사람 목소리 없이 기계 소리만 연이어 울렸다. 시중은행 직원을 가정한 이들이 네모반듯하게 묶인 오만원권 뭉치를 컨베이어 벨트에 놓자 돈 포대가 이동했다. 자동검수기가 돈 포대의 크기와 무게를 재고 난 뒤 컨베이어 벨트는 다시 움직였다.

그러자 성인 남성 두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팔레타이징 로봇이 사람의 팔 역할을 대신해 포대를 들어 올려 팔레트에 하나 둘씩 반듯하게 쌓기 시작했다. 이렇게 5억원어치 돈 포대가 총 60개, 300억원까지 쌓이는 데 6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쌓인 화폐다발들은 또 수직 반송기와 컨베이어를 타고 금고로 이동한다. 금고 내에서도 무인 운반 장치가 자동으로 화폐를 운반하고 선반에 넣는다. 이 돈이 한은 밖으로 나가는 과정까지도 사람이 낄 구석이 없었다.

1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부 화폐수납장에서 팔레타이징 로봇이 돈 포대를 팔레트 위에 쌓고 있다. ⓒ뉴시스

◆'아직도 미제사건' 중앙은행 강도는 실화였다

사실 범죄의 재구성이 베일을 벗을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중앙은행을 상대로 한 은행 강도는 마냥 공상으로 치부할 사안이 아니었다. 한은이 모방범죄를 우려하며 문단속에 나설 정도였다.

범죄의 재구성 개봉을 이틀 앞두고 있었던 2004년 4월 13일 당시 한은 측은 서울 남대문로 본부은 물론이고 16개 지역본부에 영화와 비슷한 범죄의 가능성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출입자에 대한 통제와 검문·검색 강화는 물론, 현금보관소 등 중요 지역을 지키는 경비 인력에게 기관총과 실탄을 추가 지급하기도 했다.

실제로 범죄의 재구성은 1996년 경북 구미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기 사건에서 착안한 영화다. 한은의 역사에서 아직도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한 부끄러운 발자취가 모티프였다.

그해 설 연휴 첫날이던 2월 17일 한은 구미사무소에 대동은행 구미지점 직원을 가장해 나타난 범인 2명은 은행 간 내부거래용 백지 당좌수표를 내고 현금 9억원을 인출해 갔다. 경찰은 현·전직 은행원이 낀 범행으로 보고 400여명을 대상으로 수사를 펼쳤으나 사건의 단서를 찾지 못한 채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이처럼 한은이 감추고 싶었던 과거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대명사인 최동훈 영화감독의 데뷔작으로 재탄생하면서 더욱 유명한 사건이 돼 버렸다.

김근영 한은 발권국장은 "사람의 금고 출입과 화폐 접근을 차단하고 첨단 폐쇄회로TV를 확충하면서 보안이 강화됐다"며 "화폐 운반이나 적재하는 수작업이 기계화로 바뀌면서 안전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또 한은은 발권업무가 종전보다 신속, 정확해지는 등 훨씬 효율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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