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 모집에 심판 찾기, 힘들어서 더 즐거웠던 활쏘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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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 기자]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아침. '금단의 구역'이었던 통영 한산도 제승당 내 활터(한산정)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윽고 10명 청년들이 사대에 서서 차례차례 활을 쏘기 시작했다. 한산대첩 431주년 및 광복절 기념 습사(활쏘기 연습) 프로젝트 '한산: 습하의 출현' 이야기이다.
▲ 한산도 제승당에서 활을 쏘는 대학생들 |
ⓒ 김경준 |
그러자 바로 떠오른 곳이 통영 '한산도'였다. 한산도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물리친 한산대첩의 현장이거니와,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항일과 구국의 성지다.
▲ 한산도 제승당 활터(한산정) |
ⓒ 김경준 |
사실 이는 나의 숙원이기도 했다. 꼭 1년 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활을 들고 한산도 제승당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승당은 문화재이기 때문에 활터를 함부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 이용료(시간당 5만 원)도 내야 하고 최소 일주일 전에 신고해서 제승당 관리사무소의 심사를 거쳐 허가를 받아야만 이용이 가능하다.
이러한 규정을 모른 채 무턱대고 찾아갔던 나는 관리사무소 직원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마주해야만 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의 활터에서 활을 쏴보고 싶다는 꿈은 후일로 미루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관련 기사: <한산> 때문에... 활을 지고 1박 2일 돌아다닌 사연 https://omn.kr/20nn5).
이처럼 제승당 활터는 이용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해 지금까지 쉬이 열리지 않는 금단의 구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선다는 것은 모든 궁술인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프로젝트명이 '한산: 습하의 출현'인 이유
제승당 습사라는 광복절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기왕이면 혼자보단 여럿이 함께하며 특별한 경험을 나누면 더 좋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나는 올해 한양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한양대 국궁동아리 '심궁회'에 가입한 바 있다. 국궁동아리 학생들과 함께하면 학생들에게도 좋은 추억을 안겨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출발하기 열흘 전, 같이 갈 인원을 구한다는 글을 동아리 단톡방에 올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인원이 모이질 않은 탓에 서울 지역 다른 대학 국궁동아리 학생들에게도 홍보를 부탁했다. 그러자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간밤에 올린 글을 보고 하루 만에 천운(광운대 국궁동아리), 설화(서울여대 국궁동아리) 등 여러 대학 국궁동아리 학생들이 함께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한산대첩 431주년 및 광복절 기념 습사 프로젝트를 위해 '습하(습사하고 싶은 사람들 모이다)'라는 모임이 결성됐다. 프로젝트명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패러디하여 '한산: 습하의 출현'으로 정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벽에 부딪혔다. 제승당 관리사무소에서 활터 이용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보내온 것이다.
"이곳은 문화사적지로 아무나 활쏘기를 할 수 없다. 특히 일반 활터와 달리 안전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고, 문화재 훼손 등의 우려도 있기에 지도 사범 없이 학생들끼리만 와서 습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리사무소에서 요구하는 '지도 사범'의 조건은 '궁도지도자자격증' 소유자를 의미했다. 즉 전문스포츠지도사 1~2급(종목: 궁도), 생활스포츠지도사 1~2급(종목: 궁도), 공인지도자 1~3급(대한궁도협회), 공인 심판 1~3급(대한궁도협회) 중 하나라도 해당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심판은커녕 공인 단증조차 없는 나는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여 '여행 취소'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설렌 마음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을 학생들을 생각하니 학생들에게 취소를 통보하기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관리사무소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할 만한 분을 수소문했고, 그 결과 이번 여정에 함께 하게 된 활빈(전북대 국궁동아리) 출신 학생의 소개로 대한궁도협회 공인 심판분을 모셔올 수 있었다. 그분을 인솔자로 하는 조건으로 마침내 관리사무소의 허가가 떨어졌다. 이제 떠날 일만 남았다.
한산대첩 기념일에 진행한 열무정 습사
8월 14일 아침, 습하 멤버들이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 모였다. 소속 대학이 달랐기에 서로 초면인 학생들도 있었다. 사실 모임을 주최한 나부터도 일면식이 없는 멤버들이 많았다. 그러나 광복절 프로젝트라는 특별한 여정을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끈끈한 관계가 형성된 듯, 어색함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웠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장장 4시간 30분을 달려 통영에 도착했다. 한산도는커녕 통영 방문 자체가 처음인 학생들이 많았기에 다들 기대에 부푼 모습이었다.
▲ 한산도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통영 열무정 |
ⓒ 김경준 |
열무정 안희진 사두님을 비롯하여 정건영 고문님, 변준규 사범님, 임채훈 명궁님, 정소란 접장님 등 열무정 사원 분들은 서울에서 국궁을 배우는 대학생들이 내려왔다고 하자 매우 반겨주시며 실컷 활을 쏘고 갈 수 있도록 각별한 배려를 해주셨다.
▲ 한산도 앞바다가 보이는 통영 열무정 |
ⓒ 김경준 |
해 저물 무렵까지 활쏘기를 즐긴 습하 멤버들은 밤늦게 숙소로 돌아와 영화 <한산 리덕스>를 감상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광복절, 한산도 활터에 서다
마침내 8월 15일 광복절 아침이 밝았다. 활 가방을 멘 채 부푼 가슴을 안고 한산도로 건너가는 배 위에 올랐다. 20분 정도 지나자 한산도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이순신의 '한산도가'가 새겨진 비석 |
ⓒ 김경준 |
한산도에 상륙한 우리는 곧장 제승당에 올랐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는데, 당시 집무실로 쓰인 건물이 바로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정유재란 당시 운주당 건물은 소실됐고 영조 15년(1739)에 와서야 이 자리에 다시 건물을 세우면서 제승당(制勝堂)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 한산도 제승당 |
ⓒ 김경준 |
우리는 먼저 충무사(사당)를 찾아 이순신 장군의 영정에 참배한 뒤, 태극기를 들고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이어 제승당 관리사무소 직원의 안내로 활터(한산정)에 올랐다.
▲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설치된 과녁 |
ⓒ 김경준 |
"활 배우겠습니다."
▲ 한산도 제승당 활터(한산정)에서 각궁을 당기는 기자의 모습 |
ⓒ 김경준 |
일반 활터의 경우 과녁 및 화살의 손상 방지를 위해 화살이 과녁에 맞고 튕기게끔 설계되어 있다. 대신 과녁 위에 '전등'을 달아, 맞으면 불이 들어오는 것으로 관중 여부를 알려준다.
▲ 과녁에 박힌 화살들 |
ⓒ 김경준 |
활터 앞에 세워진 안내판의 설명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부하들과 습사를 할 때 편을 갈라 내기(편사)를 하면서 진 편이 술과 떡을 준비해 이긴 편에게 대접하곤 했다고 한다. 우리 역시 '살치기(화살 주워오기)'를 조건으로 서로 편을 갈라 편사를 진행했다.
▲ 제승당 활터에서 활을 쏘는 대학생 |
ⓒ 김경준 |
나 역시 이순신 장군과 휘하 장졸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한 발 한 발 일시천금(一矢千金: 화살 한 발이 천금과 같다는 뜻으로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최선을 다해 쏘라는 뜻)의 자세로 활을 내고자 했다.
▲ 한산도 제승당 활터에 모인 국궁동아리 소속 대학생들 |
ⓒ 김경준 |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한 학생들에게 이번 습사 여행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비록 무더위와 바닷바람의 습도가 합쳐져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열정과 희열로 더 뜨겁게 불타올랐던 것 같다." ('심궁회' 장형준)
"광복절에 이순신 장군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취지가 너무나도 특별하고 좋았다." ('천운' 조하연)
"정비가 잘된 일반 활터와 달리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설화' 강연진)
여행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모두에게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하니 기획자로서 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여행 자체가 무산될 뻔했던 위기도 있었지만 모두가 마음을 모은 결과 광복절이라는 특별한 날, 구국의 성지인 한산도에서 활을 내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 2023년 8월 15일 광복절, 한산도 제승당을 찾은 국궁동아리 소속 대학생들 |
ⓒ 김경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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