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깅 트래블]안동 수졸당 종택은 지금도 어김없이 음력 6월15일 '유두차사'를 지낸다
제철 곡물·과일로 제사, 15대 종부가 이어온 건진국수 전통
2021년부터 제사 일반에 공개 "전통 나누는 것이 어른의 몫"
명절 또는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에서 올리는 제사를 뜻하는 차례(茶禮)는 뜻 그대로 차를 올리는 제사였다. 신라시대 충담사(忠談師)가 매해 삼월 삼짓날과 중구(重九,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에 차를 끓여 올렸다는 기록이 그 배경이다. 풍속이 변함에 따라 차는 술로 변하고, 초하루와 보름의 참례와 더불어 설, 정월 보름, 유월 유두, 동짓날에 올리는 제사에는 차사라는 용어가 오늘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중 오늘날 가장 낯선 절기인 유두는 우리 고유 명절로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는 없는 삼한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날이었다. 이 음력 6월 15일 유두를 지금도 잊지 않고 기리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 수졸당 종택은 이날도 어김없이 차사 준비로 분주했다.
퇴계 이황(1502~1571)의 방계 종택인 동암종택은 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1559-1637) 의 종택으로 이 집 오른쪽 작은 기와집인 ‘수졸당’이 대중에 알려져 있다. 후손들이 이영도 선생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사(齋舍)였는데, 17세기에 지은 건물을 안동댐을 만들면서 1975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수졸당의 15대 종부인 윤은숙 씨는 유두차사 상의 주인공인 건진국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건진국수는 유두 절기 중 타작한 제철 밀가루와 콩가루를 3:1 비율로 섞어 2~3시간 숙성한 뒤 반죽해 홍두깨로 얇게 밀어 면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얼마나 면이 얇은지 바닥에 댄 한지에 쓰인 글씨가 훤히 비칠 정도여야 한다니, 그 정성을 짐작할만하다.
이 면을 찬물에 씻어 건진 후 차갑게 식힌 육수에 자작하게 곁들여 고기, 계란지단, 애호박, 참깨 등 다양한 꾸미(경상도식 양념)를 올려 제사상에 올렸다. 얼핏 보면 그저 한 그릇 국수인가 싶지만, 얇고 가는 면발은 소면보다 하늘거리고, 육수 또한 지금에야 소 양지머리나 닭고기로 내지만 과거에는 낙동강에서 잡은 은어로 우려냈다고 하니 깃든 노력과 수고에 담긴 제사와 전통을 향한 종가의 자부심이 입안에 퍼지는 음식이었다.
한여름 수확한 제철 곡식과 과일, 그리고 정성 가득한 국수가 오른 제사상이 재사(齋舍)에 차려지자 문중의 어른들과 어린 손자가 잔을 올리며 제를 올렸다. 본래 문중 직계 어른이 아니면 재사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수졸당은 2021년부터 유두차사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그 덕에 어린 손자가 절을 올릴 수도, 기자와 같은 객이 들어와 이 광경을 지켜볼 수도 있게 됐다. 이날 함께 제사에 참여한 가족 중 한 분은 “취재진 덕분에 시집와서 30년 만에 제사상을 처음 보네요”라고 말했다.
종부의 손끝에서 음식이 준비되고, 집안 여인들이 모든 상차림을 도맡지만 정작 제사상은 오늘에서야 처음 본다는 말이 마음을 울렸다. 수졸당 15대 종손 이재영 씨는 “고스란히 옛 모습으로 전통을 지키느냐, 아니면 바뀐 세월에 맞춰 변화해야 하냐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전통을 나누는 것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박제된 전통이 아닌, 살아있는 행사이자 의식을 젊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자 진정한 의무라는 뜻으로 읽혔다.
이날 제사상은 여섯기가 마련됐는데, 4대조(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의 상과 불천위(不遷位) 2기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곳 수졸당은 퇴계 이황과 동암 이영도 두 조상이 불천위로 마침 뒷산과 앞산이 두 조상의 묘소가 있어 문중 제사를 지내는 의미가 남다를뿐더러, 오늘날 희미해진 절기인 유두를 기리면서까지 봉사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종택이다. 이 꼿꼿한 기운을 이어받고자 수졸당에서 운영하는 고택 체험에는 연일 신청자가 줄을 잇는다고 한다. 이날 유두차사에도 전일 고택에 묵은 가족이 함께 참여해 더위를 쫓고 조상께 예를 다하는 전통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겼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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