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이자 <독립선언서> 비밀인쇄의 주역

김삼웅 2023. 8. 1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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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잊혀진 선각자, 묵암 이종일 평전 1]

[김삼웅 기자]

오래 전부터 인물사에 관심을 쏟으면서 중국 후한시대 유소(劉劭)의 <인물지(人物志)>에 주목하였다. 이 책은 본격적인 인물 연구의 고전에 속한다.

사람의 일부만 알려고 한다면 아침나절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의 많은 연보를 상세히 탐구하자면 사흘은 지나야 충분하다. 왜 사흘이 지나야 충분한가? '나라의 동량'은 세 가지 자질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사흘을 논의하지 않으면 그에 대해 다 알 수가 없다. 하루는 도와 덕을 논의하고 또 하루는 법제를 논의하고, 마지막 하루는 책략과 술책을 논의한다. 그런 다음에야 그의 장점을 다 파악할 수 있어서, 그를 의심없이 천거할 수 있다. (주석 1) 

유소는 <밖으로 드러난 아홉 가지 징험>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곧으나 온유하지 못하면 나무토막처럼 고집스럽게 되고, 굳세지만 이치에 밝지 못하면 난폭하게 되며, 견고하나 깊이 살피지 못하면 어리석게 되고, 기가 드세지만 밝지 않으면 영악해지며, 성격은 화창하지만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면 들뜨게 된다. (주석 2)

굴곡이 심했던 우리 근현대사는 바른 길에 나섰다가 가뭇없이 사라진 인물이 적지 않다. 굽이마다 신념과 대의를 지키고자 희생을 감수해 온 분들이다. 시대조류에 편승했으면 호의호식했을 터인데, 양심에 따라 정의를 좇아 행동하다가 죽임·감옥·유배·테러·아사의 길을 걸었다.

이들 중에는 후대에 이르러 조명되거나 '부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묻히거나 망각된다. "역사는 기억과 망각의 투쟁이다."(호모 메모리스)는 말이 있으나, 기억보다는 망각되기 일쑤다.
 
 묵암 이종일 선생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우리가 기억하고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한 분을 소환한다. 경세(警世)의 지도자 이종일(李鍾一, 1858~1925) 선생이다. 충남 태안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박영효 수신사의 사절단으로 방일, <독립신문> 논설집필, 대한제국 민력회(民力會) 회장, 독립협회 참가, 중추원의관, <제국신문> 창간 사장, 흥화학교 설립, 보성학교 교장, 신민회 참가, <만세보> 창간 참여, 대한자강회 참여, <황성신문> 논설위원, 보광학교 교장, 대한협회조직, 천도교회월보과장, 보성사 사장,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결성 회장, 천도구국단 단장, <독립선언서>인쇄, 민족대표33인, 천도교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발행, 일제로부터 징역 3년, 제2독립선언문 집필, 인쇄 중 일경에 압수, 1925년 굶어죽음(향년 67세). 
 
 이종일 선생의 묘역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선생은 구한말 다수의 유생들이 진부한 전통의 틀에 갇혀 옛것만 붙들고 씨름할 때 깨어있는 실천자로 나섰다. 독립협회와 신민회의 핵심 멤버이고, 순 한글 일간신문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국민계몽과 한글 보급에 앞장섰으며, 각급 학교를 설립하고, 천도교에 귀의하여 <천도교회월보>를 발행하면서 비밀조직 천도구국단을 결성하여 대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자이면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였다.
기미년 3.1혁명 시기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제2독립선언을 일으키고자 <자주독립선언문>을 기초하여 인쇄 중 일경에 압수되었다. <자주독립선언문>은 <독립선언문>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선언문이었다.
 
 <자주독립선언문> 원본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개화운동에서 시작하여 언론을 통한 국권회복운동, 민중계몽운동, 한글운동, 천도교 비밀단체 구국단 조직 등 조국해방운동에 이르는 67년의 험난한 생애는 겨레의 시련과 궤를 같이 한다. 선생은 평생을 무거운 시대적 소명을 짊어지고 고빗길을 촌보의 양보없이 걸었다. 그의 길은 온통 가시밭이었다.

선생의 생애는 42년을 19세기에, 25년을 20세기에 걸치는 동안의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강점기는 난세이고 암흑기였다. 그때마다 고루한 위정자와 강폭한 지배세력에 맞서 계몽적 담론과 사회개혁의 그리고 자주독립의 길은 쉽지 않았다. 망론과 야만이 설쳤다.

선생은 1925년 8월 31일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초가의 거적 위에서 67세의 삶을 접었다. 최초의 한글 일간신문 발행인, 천도구국단 조직,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서 비밀인쇄 등 굵직한 업적만 해도 독립운동사는 물론 근현대사의 윗줄에 오를 분인 데도, 웬 일인지 망각의 대상이 되었다.

선생은 1912년부터 보성사 비밀창고에 일본제 장총 10여 정과 실탄 2백발을 은닉하고 무장항일전을 준비하고, 1919년 3.1혁명을 앞두고 천도교 보성사 대표로 있으면서 <독립선언서> 인쇄를 책임졌다. 인쇄 도중 총독부 조선인 악질 형사 신승희가 나타나 하마터면 만사휴의(萬事休矣)가 될 뻔한 위급한 순간에 "당신도 조선사람이 아니냐, 하루만 기달려 달라"고 달래며 손병희에게 안내하여 해결하는 등 선생의 존재는 3.1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나서도 항일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자주독립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마침내 다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반도 삼천리가 모두 감옥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이제부터가 더욱 의미가 있고 중요합니다. 뜻 맞는 동지끼리 다시 모여 기미년의 감격을 재현하기 위해 우리 천도교의 보성사 사원 일동은 재차 봉기하여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개화사상가, 투철한 언론인, 민족종교인, 한글학자, 여성개화지도자, 독립지사,시대를 내다보고 대책을 마련한 경륜가…. 이종일 선생은 그 시기에 대단히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지식을 갖춘 인물로서 역사의 전면에서 활동하고 투쟁하였다. 변신하거나 중절한 인물이 적지 않았던 시대였다.

선생의 삶과 죽음을 살펴볼 때 영웅적 인물은 아니지만 국난기 지식인의 책무와 역할에 충실한, 대단히 맑고 바른 경세의 지도자였다. 남아 있는 기록과 자료가 충분치 않지만, 더 이상 망각의 터널에 덮어둘 수 없어 탐사에 나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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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유소 지음, 이승환 옮김,『인물지』, 102~103쪽, 홍익출판사, 1999.
2> 앞의 책,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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