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풀이 작심하고 만든 500억 화제작, 징크스 깰까
[하성태 기자]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너 같은 사람도 있고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비밀 지켜줄게."
봉석(이정하)의 능력을 알게 된 희수(고윤정)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다. 언뜻 의외의 반응이다. 나름 감추고 또 감춰왔던 비밀을 털어낸 당사자는 더 의외다. 이상한 나라도 괜찮으니 고맙다는 봉석에게 희수는 이렇게 반문한다. 아래층에서 초능력으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봉석의 엄마 미현(한효주)은 대견하고 귀여운 듯 미소를 짓는다. 희수의 말은 이랬다.
▲ 디즈니플러스 <무빙> 포스터. |
ⓒ 디즈니플러스 |
<무빙>의 중심엔 강풀이 있다
지난 9일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무빙>의 주제를 함축하는 이 장면이 주는 의미는 여러모로 특별하다. 한국판 히어로물의 재정립, 거기에 비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에서 때때로 시도되던 마블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가는 서민형 히어로물이란 친숙함 혹은 새로움, 여기에 디즈니플러스가 제공한 K드라마 제작비 사상 최고액이라는 500억이 주는 '때깔'과 드라마 몇 편을 만들 것 같은 풍성한 배우들까지.
이처럼 화려한 마케팅 포인트가 널린 <무빙>이 정작 소박한 세계관과 <엑스맨>부터 유고(?)한 역사를 자랑하는 다양성과 소수자 감성, 그리고 대놓고 낯 간지러울 수 있는 나름의 휴머니즘과 가족애를 내세운 것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런 <무빙>의 중심에 강풀이란 이름이 자리한다. 그 이름 하나로 <무빙>을 설명하는 여러 단서들이 제공된다. 2억 뷰를 넘긴 동명 원작 웹툰의 대중성, 한국형 히어로물의 출발이란 명성, 박인제 감독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작/작가'라 이름을 올린 원작자가 직접 2년 간 쓴 극본에 대한 궁금증 등등.
결과적으로, 업계의 관심은 역대급 제작비를 쏟아 부은 디즈니플러스의 향배로 쏠린다. 최근 넷플릭스에 밀려 국내외로 이것저것 이상 신호를 보냈던 디즈니플러스가 <무빙>으로 제대로 된 역전타를 날릴지 귀추가 주목된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더 없이 적확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콘텐츠 자체의 힘이 있어야 그 역전타도 가능하고 디즈니플러스가 원하는 구독자 유입도 현실화될 터. 전체 20화 중 7화까지 공개한 <무빙>은 기존 시청자들이나 강풀 작가의 레전드의 영상화를 기다리던 원작 팬들, 그리고 500억짜리 화제작의 만듦새가 궁금한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매력적인 결과물을 내놓았을까.
▲ 디즈니플러스 <무빙> 관련 이미지. |
ⓒ 디즈니플러스 |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부지불식 알아챘다. 그러자 버스를 몰던 초능력자 아들이 버스기사라는 본인의 업을 무시하고 불법 유턴을 감행한다. 저 트럭, 택배 트럭을 쫓아야 한다! 저 놈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시작된 자동차 역주행 추격전. 죽을 고비를 넘긴 아들은 택배 기사로 가장한 킬러의 난폭 운전 트럭과 충돌한 승용차가 날아오자 가까스로 버스를 멈춰 세운다.
원작엔 없는 '번개맨' 계도(차태현)와 킬러 프랭크(류승범)의 에피소드다. 볼거리로 보나 인물의 분노한 감정선으로 보나 여타 히어로물이라면 어찌됐든 버스로 승용차를 박살내더라도 킬러를 쫓는 것이 관습일 터. <무빙>은 그 멈춰선 계도가 승용차가 폭발하거나 다른 추돌이 벌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버스를 출발시키는 장면을 기어코 삽입한다. 그리고선 1대1 대결로 넘어간다.
한 장면을 더 볼까. 희수의 아빠인 주원(류승룡)과 대결하던 프랭크는 곤죽이 된 채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이가 있나...?"라고. 이전에 제거했던 능력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물었던 그 질문. <무빙>은 그 전후로 미국으로 강제 입양돼 킬러로 길러졌던 프랭크의 전사를 꽤나 공을 들여 보여준다. 영화 <꿈의 구장>으로 유명한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을 배경으로 한 전사 말이다.
<무빙>은 이처럼 원작의 유니트함과는 별개로 히어로물의 관습과 한국형, 그리고 서민형 히어로물의 차별점, 이를 뒷받침하는 강풀 원작의 자장이 뒤섞인 흥미롭고 다층적인 텍스트다. 이를 디즈니플러스라는 글로벌 OTT가 제작했다는 외형적인 특이점을 배제해도 그렇다.
<무빙>은 그러니까 가족드라마다. 부모의 (초)능력을 아이들이 물려받는다는 설정 자체가 '한국'적인 그 무엇 자체다. 17대1로 일진들과 싸우고도 멀쩡해서 더 미안해하는 희수에게 주원이 건네는 "아빠 닮아서 그래"라는 위로는 이중적이라 더 의미심장하다. 7화까지의 서사 전체가 이 능력의 유전을 둘러싼 느릿하고 따스한 설명과 기승(起承)으로 채워져 있다.
봉석의 엄마 미현(한효주)는 무조건 아들과 본인의 능력을 감춰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그건 주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삶과 생이라는 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또 청춘들의 성정이 그러한가. 내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억눌러야 하는 능력을 제어하기란 부모도, 자식들도 쉽지 않은 법. 가족과 유전, 그로부터 오는 휴머니티(인간성)에 대한 탐구야말로 <무빙>의 열쇠말일 것이다.
<무빙>은 착한 드라마다. 10대의 성장 드라마라고 해서 다 귀엽거나 달달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건 아니다. 후반을 위한 포석임을 감안해도, 봉석과 희주, 그리고 '반장' 강훈(김도훈)을 둘러싼 청춘물을 그리는 시선 자체가 그렇다. 꼬마 시절 프랭크의 고생과 회한을 꽤나 구구절절 감상을 담아 그리는 동시에 감정이입의 여지를 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능력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어떻게 부모 세대와 힘을 합쳐 외부의 적과 맞서는가, 란 주요 소재를 잰체하거나 주제를 강변할 생각도 크게 없는 듯 보인다. 또 표현을 과하게 밀어붙이거나 폭력을 전시할 생각도 크게 없다. 추격 중에 피해 차량을 확인하는 계도의 모습이 그 일례다. 이런 제약 아닌 제약을 중후반부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궁금해질 정도다.
▲ 디즈니플러스 <무빙> 관련 이미지. |
ⓒ 디즈니플러스 |
<무빙>은 '강풀' 드라마다. 계도가 모는 304번 버스의 종점, 교복 입은 아이들의 엉뚱한 티키타카, 인물의 복장 변화로 계절의 변화를 묘사하는 방식, 서민과 자영업자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디테일한 묘사 등등 강풀 작가가 직접 원작을 극화했다는 <무빙> 전편에 아는 사람만 아는, 아니 너른 대중성을 자랑하는 '강풀 월드'다운 인장이 서려있다.
그 '강풀 월드'의 영상화는 사실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바보>, <아파트>, <순정만화>, <통증> 등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했고,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화제작 < 26년 >도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시원찮은 결과를 냈다. <이웃사람> 정도가 만족스러운 정도였다. 강풀 작가가 칼을 갈고 내놓은 작품이란 느낌이 확 와 닿는 <무빙>이 오래된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그리하여 <무빙>은 디즈니플러스 제작이라 더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카지노> 외에 이렇다 할 화제작이 없다는 현실은 그들 내부의 문제다. 미국에서 CIT의 지령을 받은 킬러가 정원고등학교를 둘러싼 서민형, 청춘 히어로들을 노린다는 설정이나 이후 북에서 온 능력자가 대립한다는 설정 자체가 흥미진진함을 더한다. 한국 드라마에서 미국 CIA가 노골적인 빌런으로 등장하는 설정이라니!
결과적으로, 즐길만한 여러 포인트가 공존한다. 달달한 청춘물을 즐겨도 좋다. 히어로물의 기승을 확인하며 향후 조인성이 등장할 중후반부를 기대해도 그만이다. 한국형 히어로물의 현재와 7천 컷 이상이라는 CGI와 VFX를 즐기는 것도 무리가 없다. <킹덤2> 이전 <모비딕>, <특별시민>으로 주목 받은 박인제 감독의 연출력도 안정적이다.
물론, 상투적이거나 게으른 설정도 뒤섞여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10대 시청자들을 고려한 학교폭력 소재나 17대1 싸움 장면이 꼭 필요했는지, 아무리 20부작이고 곁들이는 회상신이 부각시킬 후반부 떡밥들이 넘쳐난다고 해도 전반부 전개가 너무 더딘 것은 아닌지, 주요 설정인 국정원 및 차장과 요원을 연기하는 문성근과 김신록의 등장신이 동어반복 아닌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든다.
이를 상쇄하는 것은 배우들의 힘일 터다. 벌써부터 희수를 연기한 고윤정의 인지도 상승이 체감된다. 7화까지의 메인 캐릭터가 바로 희수와 프랭크일 정도다. 한효주의 엄마 연기는 어색한 듯 기대 이상이고, <극한직업>과 <염력>이 오버랩되는 류승룡 역시 8화 이후의 활약이 궁금해진다.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조화시키는 것 자체가 감독의 연출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빙>이 한국시장에서 자꾸만 위축되는 디즈니플러스를 살릴까 말까를 우리가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한국시장에서 디즈니플러스의 존재감은 미비했다. 전 세계 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의 추이를 보면, 최민식의 <카지노> 역시 월드 와이드 TV쇼 부문에서 20위권에 머무르며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디즈니플러스가 워낙 마블, 디즈니 애니메이션, 예전 미드가 활성화된 탓이지만 순위는 순위다.
다만, 이 500억짜리 글로벌 OTT 화제작이 K-드라마의 제작비 상승만 부축이지는 않는지는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 <무빙>은 16일부터 주 2회 씩 공개된다. 20화까지 공개돼야 알겠지만, 일단 <무빙>은 플릭스 패트롤 순위에서 21위에 오르며 <카지노>를 넘어섰다. 작품 내적으로나 화제성 면이나 일단 <무빙>의 '무빙'이 탄력을 받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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