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야" 피싱 판치자…ATM기, 노인들 못 쓰게 한다는 日

오효정 2023. 8. 1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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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일본인 여성 A씨는 지난 4일 유선으로 걸려온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몸 상태가 나빠져 병원으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들은 재차 전화를 걸어 “목 쪽에 종양이 생겨 목소리가 이상하다”며 “이번 일로 거래처에 폐를 끼쳐 돈을 물어줘야 하는 데다 치료비가 부족하다”고 했다. 통화 도중 전화를 바꾼 의사가 A씨에게 “아들이 인두암”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A씨는 다급한 마음에 현금 600만엔(약 5500만원)을 인출해 준비했고, 같은 날 집에 찾아온 거래처 직원이라는 남성에게 이 돈을 건넸다. 알고 보니 A씨에게 전화를 건 남자는 아들을 사칭한 사기범이었다. A씨는 그날 저녁 ‘진짜 아들’을 만난 뒤에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 아이치현 경찰이 제작한 '오레오레 사기' 예방 동영상 속 재연 화면. 유튜브 캡처

일본이 고령층 대상 금융사기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15일 주요 일본 언론에 따르면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는 고령층 외부 활동이 제한되면서 ATM(현금자동입출금기) 이용이 어려워지자 관련 사기가 잠시 주춤했는데, 최근 사기범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A씨 사례는 전형적인 ‘오레오레 사기(オレオレ詐欺)’다. ‘오레’는 일본어로 ‘나’를 뜻하는데, 정확한 신분을 밝히지 않은 사기범이 다짜고짜 ‘나에요, 나’라며 가족인 척을 해 돈을 뺏는 방식이다. “아파서 돈이 필요하다”, “사고를 쳐 급히 위자료가 필요하다” 등이 단골 ‘시나리오’다.

일본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오레오레 사기 인지 건수는 4287건으로 전년 대비 39% 늘었다. 피해액은 129억 3000만엔(약 1184억 6100만원)으로 전년 대비 42.7% 커진 수치다. 65세 이상 고령 피해자가 98.2%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올 상반기엔 2076건 발생해 전년동기 대비 22.2% 늘어 상승세가 가파르다.

등장한 지 20년이 된 전통적인 '오레오레' 수법에 고령층은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기무라 아츠시 니혼대 위기관리학부 교수는 “고령층은 청력·주의력 저하로 상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데다, 범인이 목소리를 속이기 위해 먼저 ‘감기에 걸렸다’는 핑계를 댄다”고 말했다. 혼자 사는 노인이 늘고 가족 간 교류가 줄어드는 현상 역시 범죄 증가 원인으로 꼽힌다.

김영옥 기자

오레오레 사기뿐 아니라 요금 청구 사기 등 특수사기 피해자 80% 이상이 고령층인데, 경찰청 인지 건수는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 한풀 꺾인 이후 계속해서 상승선을 그리는 모양새다. 특히 지난해 피해액은 370억 8000만엔(약 3407억 2400만원)으로 8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범죄 예방에 ‘사케 병 라벨’까지 등판…‘ATM 제한’은 “글쎄”


일본 수사당국과 관련 업계는 예방책을 고심하고 있다. 2021년에는 일본 최대 통신기업 NTT가 경찰청과 함께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통화 분석 장치를 내놨다. 유선전화에 전용 어댑터를 붙이면 통화 내용이 NTT 클라우드로 전송돼 AI가 사기 여부를 따져본다. 범인 특유의 말투, 범죄에 자주 사용되는 문장을 학습한 AI가 혐의를 포착할 경우 본인이나 가족에게 알리는 식이다. 최근에는 사케 병 라벨에 범죄 예방 문구를 다는 방안까지 등장했다.

지난달엔 일본 정부가 고령층의 ATM 이용을 제한하는 대책을 검토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교도통신은 “1년 이상 거래가 없었던 65세 이상 명의 계좌는 ATM을 이용할 수 없게 하는 방안을 경찰청이 은행업계에 제시했다”며 “고령층의 거래 편의성을 떨어뜨려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보도했다. 고령층에 대한 ATM 사용 제한 조치는 현재 일부 은행에서만 시행 중이다. 일본 정부는 이 조치를 포함해 논의를 거친 뒤 조만간 특수사기 대책을 정리할 계획이다.

외신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의 레오 루이스는 6일 칼럼에서 “특정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능력을 의심하고 서비스를 차단하는 것은 늘 문제시될 것”이라며 “지역이나 성별, 인종에 따라 ATM을 제한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도 “고령층 삶을 더 어렵게 만들 예금 봉쇄와 같은 대책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고령층은 온라인 쇼핑 등에 서툴러 여전히 현금만 갖고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은행 근무 경력이 있는 오노 토모코씨는 SCMP에 “근처에 은행이 없는 지방에 사는 노인의 경우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오효정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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