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콩 농사 얘기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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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재판은 돈 싸움이다.
원고는 "돈을 달라"고 하고, 피고는 "줄 돈이 없다"고 한다.
돈을 달라는 원고에게는 최대한 얼마나 깎아줄 수 있는지 묻고, 줄 돈이 없다는 피고에게는 최대한 얼마나 줄 수 있냐고 묻는 것이 법원 조정위원인 나의 일이다.
민사재판이 돈 싸움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감정싸움인 면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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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재판은 돈 싸움이다. 원고는 “돈을 달라”고 하고, 피고는 “줄 돈이 없다”고 한다. 돈을 달라는 원고에게는 최대한 얼마나 깎아줄 수 있는지 묻고, 줄 돈이 없다는 피고에게는 최대한 얼마나 줄 수 있냐고 묻는 것이 법원 조정위원인 나의 일이다. 때로는 내가 변호사인지, 시장바닥에서 흥정하는 중개상인지 헷갈린다.
그날도 원고와 피고는 법원 조정실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더러 먼저 원하는 액수를 불러보라고만 할 뿐 자신이 원하는 금액은 쉽사리 꺼내 놓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얼른 자리를 분리해야 한다. 다행히 혼자 남은 원고는 슬그머니 천만원 정도만 받으면 소송을 끝내겠다고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자리를 바꿔 조정대기실에 앉아 있던 피고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분, 변호사와 함께 들어와서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가 작년에 텃밭 농사를 시작해서 콩을 심었거든요. 그런데 콩 농사가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콩 한 말 수확하는데 말이지요….”
“아이고, 하하. 콩 농사 이야기 말고, 합의하실 수 있는 금액을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그래도 이분, 김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비료는 어떻게 줘야 하는지 등 계속 콩 농사 이야기다. 같은 편인 변호사도 웃으면서 이제 그만 하라고 말린다. 곧 점심시간인데 이러다가는 밥도 못 먹겠다 싶어 얼른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힘들게 콩 농사 지어 팔아도 콩 한 알에 얼마 못 받는데, 돈이 얼마나 아까우시겠어요. 절대 저쪽에는 말 안 할 테니까 저한테만 살짝 말씀해줘 보셔요.” 애타는 내 마음과 달리 이 점잖은 충청도 양반, 씩 웃기만 하고 여전히 쉽게 본심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얼마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다년간의 경험상 이런 분들에게는 주관식보다는 객관식 또는 예시 답안을 드리는 게 더 쉽다. “자, 선생님~ 1번은 천만원, 2번은 오백만원, 3번은 삼백만원! 이 중에 몇 번 가실까요?” 이거나 “선생님, 이건 제가 예를 드는 거지, 절대 이렇게 하시라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천만원 주라고 하면 주실 거예요?” 이거다. 선생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도 또 물어본다. “아, 그럼 오백만원 주라면 주세요?” 그제야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선생님. 휴, 콩 심는 얘기 꺼내기 전에 먼저 객관식 문제를 드렸어야 했는데 내가 많이 잘못한 것 같다. 어쨌든 이 사건은 점심시간 전에 맞춰 잘 끝났지만 이렇게 사람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렵다.
사람들은 대개 처음에는 “돈 때문에 소송한 것이 아니라 괘씸해서 그런다”거나 “돈이 없어 안 주는 것이 아니라 배신감이 느껴져서 그런다”는 식으로 말한다. 민사재판이 돈 싸움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감정싸움인 면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감정싸움의 터널을 지나 누구라도 먼저 돈 액수를 말하는 순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이제부터 제대로 협상판을 벌일 수 있겠다 싶기 때문이다. 옛말에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며, 조정 전문 변호사로서 나름 정리한 설득과 협상의 4단계는 이렇다. 1단계는 경청과 공감, 즉 감정을 읽어주는 것이다. 2단계는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3단계는 구체적 수치와 통계를 제시하며 장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4단계는 몇 가지 안을 제시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내가 스스로 주도하고 선택했다”는 만족감이다.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한다면 설득하려는 태도를 버려 보자. 상대방이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을 때 그것이 진정한 설득의 출발점이 될 테니 말이다.
안지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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