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조사에서 야당에 뒤진 여당, 총리는 말을 바꿨다 [권신영의 해리포터 너머의 영국]
[권신영 기자]
▲ 지난 7월 2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서부 억스브리지에서 보궐선거가 실시된 이날 한 시민이 투표소로 들어가고 있다. |
ⓒ 연합뉴스 |
올해 7월 20일은 정반대인 모양새다. 보궐 선거가 진행된 이날 런던 서부 억스브리지는 그중 한 곳이었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가 파티 게이트로 의원직에서 물러나며 이뤄진 만큼 노동당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보수당 승리였고 주원인은 노동당 사디크 칸 런던시장이 추진한 초저공해구역 확산에 대한 반감이었다. 여기서 정치적 공백을 읽은 리시 수낵 총리는 7월 말~8월 초 반기후 발언과 정책을 연달아 내놓고 있다.
작용과 그에 대한 반작용. 사회적 합의가 깨진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 합의를 일상생활 영역으로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진통인 걸까. 논의의 핵심어는 좀 복잡하다. 본질은 기후변화와 환경이지만, 논의는 공정, 자유와 권리, 생활비 위기, 에너지 자립 등의 개념이 더해져 있다.
억스브리지 보궐선거의 향방을 가른 초저공해구역이란 대기오염 배출량 초과 차량이 런던에 들어올 때마다 12.5파운드(2만 1000원)를 부과하는 정책이다. 주로 7년 이상 된 디젤차량, 17년 이상 된 승용차다. 런던 교통국은 런던에 등록된 차량의 약 6%가 기준 미달일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기준미달 차량 소유주가 통행세를 내지 않기 위해서는 부품을 교체하거나 새 차를 구입해야한다.
이 정책은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런던시장 재직 중 입안해 2019년 실시되었다. 당시 런던 도심에만 적용되었으나 2021년 노동당의 사디크 칸 현 런던시장이 적용 지역을 확대했다. 그리고 정책이 성공했다고 판단해 올해 초 광역 런던시 전체 확대 추진을 결정했다. 시행일은 오는 29일이다.
하지만 2년 전 1차 확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지난 2월 런던 변두리 5개 지역구가 런던시장을 상대로 고소했다. 지역구와 토론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았고, 시장의 권한을 넘어선 결정이며, 소요 예산이 잘못 사용되었다는 게 이유였다. 정책에 대한 반발이 심상치 않음은 보궐 선거 결과로 증명되었다. 원래 보수당 텃밭이고 표 차가 500표 미만이었지만 말이다.
사디크 칸 런던시장이 놓친 것은 누가 통행료를 내야 하는가였다. 낙후 차량 소유주는 저소득층이나 영세업자일 가능성이 높고 이들의 비중은 런던 주변부로 갈수록 늘어난다. 기후와 환경이라는 대의에 공감하더라도 현재 생활비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낙후된 차량을 교체할 경제적 능력이 없다. 노동자 계층을 대표하고자 하는 노동당이 이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곤란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 영국 런던의 '교통량적은지역'(LTN)을 표시하는 표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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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는 농민층에서 두드러졌다. 이들은 낙후 차량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가축을 이동시킬 현실적 방법이 없고 시장이 장려하는 공공 교통수단을 이용한다는 취지로 양이나 작은 말을 버스와 기차에 태워 이동하는 등 상징성 짙은 시위를 했다.
앤디 버넘 맨체스터시장은 정책 시행 3개월을 앞두고 급선회했다. 청정구역 정책을 둘러싼 세부 논쟁에 좀 더 빨리 "눈을 떴어야 했다"며 코로나19로 생겨난 공급망 문제, 인플레이션, 그리고 낙후 차를 대체할 차량 수급 문제 등 제반 여건을 고려했을 때 "불공정"한 정책이라며 물러섰다.
단 취소가 아니라 연기다. 앤디 버넘 시장은 벌금보다는 자발적 교체를 장려하는 보조금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도보, 자전거와 버스, 기차 등 대중교통 대책을 2025년까지 충분히 정비한 후 재추진한다는 입장이다.
맨체스터시장과는 달리 런던시장은 강경했다. 이미 시행 경험이 있는 데다 런던은 맨체스터보다 공공 교통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고 저소득층에 대한 보조금 정책으로 여론을 설득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억스브리지 선거 결과는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노동당 키어 스타머 대표와 보수당 리시 수낵 총리까지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물러서느냐 뚫고 나가느냐의 기로에서 지난 7월 28일 영국 고등법원은 사디크 칸 런던시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난 2월 지역구가 런던시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사디크 칸 시장의 정책 입안 과정이 합법적이었다고 판단했다. 여기에는 런던 지역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는가도 포함되어 있다.
법원 판결 후 사디크 칸 런던시장은 "고등법원의 만장일치 판결은 런던 공기를 깨끗이 하고 기후 위기를 막는 과제,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계속 추진하게 해주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억스브리지 선거에 대해서는 "(그곳에서) 노동당이 승리한 경우를 평생 본 적이 없다"며 보수당 강세 지역임을 강조했다.
런던시는 예정대로 오는 29일 초저공해구역을 추진한다. 다만, 저소득층과 영세업자에 국한되었던 보조금을 전면 확대해 시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보완책을 제시했다.
▲ 지난 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리시 수낵 총리 관저가 있는 다우닝가 밖에서 기후 단체 '마더스 라이즈 업' 소속 활동가들이 영국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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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 수낵 총리는 기후론자가 아니다. 하지만 영국이 글래스고 기후회의를 개최한 2021년 11월 당시 그는 보리스 존슨 내각의 재무장관이었다. 개최국으로서 기후 문제 해결에 앞장서라는 노동당 압력에 비기후론자였던 보리스 존슨 총리도 입장을 바꾸었고 리시 수낵 역시 마지못해 동조했었다.
2050년 탄소 중립을 선언한 보리스 존슨 총리는 구체적 방안으로 2030년 석유차 판매 금지와 2035년 가스보일러 판매 금지를 발표했다. 전기차와 열펌프로의 교체에 필요한 예산을 당시 재무장관이던 리시 수낵이 맡았다. 향후 5년간 60만여 개의 열펌프 설치를 목표로 5000파운드(844만 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계획이었다. 열펌프 설치 비용은 약 1만 4000파운드(2364만 원)다.
하지만 7월 24일 리시 수낵 총리는 소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부담되는 열펌프로의 교체를 연기 혹은 포기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이어 영국 정부는 2030년 석유차 판매 금지와 2035년 가스보일러 판매 금지를 포함한 기후 정책을 "계속 검토하겠다"며 총리 발언을 인정했다.
리시 수낵 내각에서 주택 등 생활 수준 높이기 주무 부서인 주택개발지역사회부 마이클 고브 장관은 보다 공개적으로 정책 후퇴를 타진했다. 신규 주택은 열펌프를 설치하겠지만, 기존 주택을 빠른 속도로 교체하는 것은 인플레이션으로 생활비 위기를 겪고 있는 가구에 경제적 무리라는 이유였다.
7월 31일 리시 수낵 총리는 한 발 더 나가 에너지 안보와 자립을 위해 북해 석유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2050년 탄소 중립에 도달한다 해도 여전히 에너지의 4분의 1은 석유와 가스에서 나온다"며 이것을 외국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가진 자원으로 충당하는 것이 낫다"고 설명했다. 가을까지 100개 이상의 개발 허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리시 수낵 총리는 운전자들의 권리와 자유를 내세워 교통량적은지역 정책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는 최소단위 지자체의 지역 정책으로 차량을 시속 20마일(32킬로미터)로 제한하고 일부 길은 버스 등 허가 받은 차량만 접근할 수 있다. 조용하고 안전한 동네 환경을 조성하고 차량 사용을 줄이는 대신 보행과 자전거 이용을 일상화하고 장거리 이동 시 대중교통을 장려한다. 2020년 이후 런던, 브리스틀, 버밍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하지만 7월 30일 리시 수낵 총리는 시속 20마일 구역 재검토를 시사하고 자신은 "일상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자기 차를 사용하는 사람들 편에 있다"고 말했다. 기후와 환경에 대한 사회적 노력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방점을 두는 어조다.
경제적 부담, 개인의 자유와 권리, 국가의 에너지 자립 등의 논리로 기후 정책을 후퇴시키며 노동당과의 정책적 차이를 내세우는 리시 수낵 총리의 행보에 영국인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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