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이 나라 갈 때는 국경검문이 없습니다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8. 1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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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독립과 해방의 흔적이 쌓인 도시, 더블린으로 오는 길

[김찬호 기자]

벨파스트에서 기차를 타고 더블린으로 향합니다. 이제 영국을 떠나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향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네 시간의 기차 여행을 거쳐 다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국경 검문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면서,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의 국경은 유럽연합 회원국과 비회원국 사이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사람도 물건도 이동이 엄격하게 통제되어야 하겠지만, 아무런 검색이 없는 열린 국경은 여전합니다.
 
 더블린 리피 강변
ⓒ Widerstand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일랜드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었습니다. 19세기부터는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이 더욱 거세지죠. 
결국 1918년 총선에서 아일랜드의 시민들은 아일랜드 독립파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아일랜드 독립파는 이를 기반으로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언했죠. 영국은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습니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벌어졌죠.
아일랜드 독립 세력에 비해 영국의 무력은 강력했습니다.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일랜드 독립군은 게릴라 전술을 동원해 영국군을 끝없이 괴롭혔죠. 게다가 당시는 1차대전이 끝난 직후였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은 이미 전쟁의 피로감에 지쳐 있었습니다.
 
 영국에 대항한 부활절 봉기가 벌어진 중앙우체국 앞
ⓒ Widerstand
결국 영국은 2년의 전쟁 끝에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사실상의 독립 인정이었죠. 하지만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인정한다는 점, 외교권과 군사권은 영국이 갖는다는 점, 무엇보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남는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아일랜드 독립 세력은 분열했습니다. 일부는 이 조약에 찬성했고, 일부는 반대했습니다. 찬성파는 아일랜드 자유국을 세웠죠. 반대파는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이제는 영국이 아니라, 한때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아일랜드 자유국을 향한 전쟁이었습니다. 아일랜드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은 아일랜드 자유국의 승리였습니다. 조약 반대파 인사는 1년 만에 대부분 전사하거나 체포되었습니다.
 
 중앙우체국에 걸린 아일랜드 국기
ⓒ Widerstand
하지만 아일랜드는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조약 반대파 인사들을 대부분 빠른 시일 안에 석방했습니다. 조약 반대파는 무력 투쟁을 포기했고, 아일랜드 자유국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약 반대파는 아일랜드 공화당을 창당했습니다. 그리고 1932년, 창당 6년 만에 집권하기에 이르죠. 집권당이 된 아일랜드 공화당은 영국에서의 독립 노선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결국 1937년 헌법 개정을 통해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죠. 아일랜드 공화국이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조약 반대파가 주축이 된 아일랜드 공화당과 조약 찬성파가 주축이 된 아일랜드 통일당은 아일랜드 공화국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아일랜드 독립 이후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구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 패트릭 성당
ⓒ Widerstand
지속된 분쟁은 결국 협상과 정치를 통해 결착을 맺은 셈이었습니다. 조약 반대파는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결국 선거와 헌법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냈습니다. 내전의 상대였던 두 세력은 이제 의회의 정당으로 남아 제도적인 협력과 갈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아일랜드에도 여러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북아일랜드 통합은 조약 반대파가 끝까지 얻어내지 못한 과제였죠. 하지만 그조차도 성 금요일 협정과 북아일랜드 자치의회의 설치로 폭력적 대치는 종식되었습니다.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 지배는 길었습니다. 그만큼이나 오랜 기간 아일랜드에 상처를 남겼죠. 그것은 꼭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만은 아니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두고, 아일랜드의 시민들 사이에도 갈등과 분쟁의 씨앗을 뿌리고 말았죠. 하지만 아일랜드는 결국 그 상처를 극복해낸 셈입니다. 갈등과 분쟁을 의회라는 제도 안으로 밀어넣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트리니티 칼리지
ⓒ Widerstand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 여전히 열려 있는 국경도 그런 식민과 극복의 흔적입니다. 아일랜드는 독립 당시부터 영국과의 국경을 개방했습니다. 유럽연합 국가들 사이 국경을 없앤 '쉥겐 협정' 체결보다 60여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유럽 단일시장이 도입되면서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는 세관 검사조차 사라졌습니다. 물론 브렉시트 과정에서 이 국경도 당연히 문제가 되었습니다. 영국은 유럽연합에서 탈퇴했지만, 아일랜드는 여전히 유럽연합 회원국이니까요.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면서, 다른 유럽연합 국가에서 영국으로 넘어가는 물건은 당연히 세관 검사를 받고 관세를 매기게 됩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에는 세관 검사가 없죠. 그렇다면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넘어가는 물건에는 관세가 매겨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건을 아일랜드를 거쳐 영국에 수출하면 관세를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겠죠.

그렇다고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다시 세관 검사를 도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영국은 이미 1998년 성 금요일 협정을 통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 완전히 자유로운 통행권을 약속했으니까요. 겨우 만들어낸 평화를 그렇게 깰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은 북아일랜드만 실질적으로 유럽 단일시장에 잔류시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로써 북아일랜드와 영국 본토 사이에는 같은 나라인데도 관세 장벽이 있는 기묘한 상황이 만들어졌죠.
 
 아일랜드와 유럽연합 깃발
ⓒ Widerstand
하지만 그조차 영국의 과거사가 남긴 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짐을 스스로 지는 것 역시 영국이라는 국가에 주어진 운명이겠죠. 
7년 전, 제가 더블린에 왔을 때는 영국도 아일랜드도 유럽연합의 회원국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때는 더블린에 온다는 것의 감상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죠. 하지만 유로를 쓰고, 유럽연합의 깃발이 걸린 더블린의 거리가 어쩐지 오늘은 더 다르게 느껴집니다.
 
 더블린 리피 강변
ⓒ Widerstand
더블린 시내의 여러 안내판에는 영어와 함께 게일어가 쓰여 있습니다. 게일어는 잉글랜드인의 유입 전, 원래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켈트족이 사용하던 민족 언어입니다. 영어에 밀려 거의 사멸했던 언어를,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이 의도적으로 부활시킨 언어죠. 지금도 광범위하게 일상 언어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게일어로 된 안내판은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절 봉기의 현장이었던 아일랜드 중앙우체국 앞, 높이 솟은 깃대를 바라봅니다. 게일어부터 시내 곳곳의 유적까지, 더블린에는 식민과 독립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흔적 위에서 만들어 낸 아일랜드 공화국의 오늘이 있습니다. 전쟁의 상대방은 이제 정당으로 남았습니다. 이제는 그 정당 사이의 경계마저 흐려지고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이제 유럽연합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유럽으로 오는 길은 열려 있었습니다. 독립과 해방의 흔적이 쌓인 도시, 더블린으로 오는 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 개방과 통합에, 식민의 시대를 넘어서는 아일랜드의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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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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