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항일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를 만나다
[박상준 기자]
광복의 달 8월인데 들리는 소식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과거의 잘못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은 우리 국민들의 우려를 무시한 채 8월말에는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한다고 한다. 일본 국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주변국에도 재앙이 될지 모르는 만행을 저지르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여당이 오히려 일본 정부나 여당보다 더 핵 오염수 방류를 정당화하고 당연시하며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 우리를 더 불편하게 한다.
또 보훈부는 백선엽 장군 본인도 인정한 분명한 친일 행적마저 기록에서 지우는 지경에 이르니 아직 일제의 침략은 끝나지 않고 친일 행위가 대를 이어 계속되는 듯하여 경축해야 할 광복절이 우울한 하루가 되었다. 이럴 때 일수록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백산 안희제 동상 |
ⓒ 박상준 |
이번 광복절에는 부산의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1885~1943)를 기억하면서 부산의 원도심지인 중구에 있는 백산기념관을 소개한다. 부산 시민은 물론 여름이면 부산을 찾는 여행객들이 꼭 한번 백산상회가 있던 역사적인 공간에 자리잡은 백산기념관을 찾아 안희제를 기억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지난 6월 오랜만에 고향 부산을 여행하면서 만난 백산기념관. 은퇴하기 전 근현대사 수업 때 안희제의 활동에 대해 가르치기도 한 나도 여기에 기념관이 있는지 모르고 있다가 숙소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그 정도로 백산 안희제는 무관심한 가운데 잊혀진 인물이 된 것 같아 나 스스로를 자책하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부산 중구의 백산로(동광동)에는 백산 기념관이 있다. 부산의 원도심지 중 가장 번화가인 광복동 근처에 있는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 이곳이 안희제의 독립활동 거점인 백산상회가 있던 역사적인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안희제는 그 활동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로 여겨진다. 일제 경찰도 오랫동안 증거를 잡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비밀활동으로 임시정부와 연통하고 있어서 김구 선생 외에는 거의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일부에서는 그를 사업을 위해 총독부의 앞잡이가 된 인물 정도로 취급하기도 했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주도한 정세도 그를 크게 드러나지 못하게 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만주군 출신인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뒤에는 더욱 독립운동가 발굴에 힘쓰지 않았을 것이다.
▲ 백산상회가 있던 건물(전시물 사진 재촬영) |
ⓒ 박상준 |
이 기념관은 안희제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1995년에 세워졌다. 그가 설립한 무역회사 백산상회가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이다. 백산상회는 안희제가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의 투자를 받아 무역회사의 형태로 세운 회사다. 백산상회는 무역 거래로 위장하여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전달하였다.
▲ 백산기념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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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입구의 모습은 루브르박물관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킨다. 1층의 출입문으로 들어가 바로 지하로 내려가면 안희제를 기억하기 위한 전시관이 나온다. 이곳에서 그의 생애와 활동 기록들을 만날 수 있다.
▲ 백산 안희제와 생가(전시물 사진 재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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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는 1885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민족교육, 민족기업 육성, 항일언론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한 위대한 민족독립 운동가였다.
▲ 백산 안희제의 교육구국운동 (전시물 사진 재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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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 안희제의 언론.학회 활동 기록(전시물 사진 재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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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경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개편했다. 그 뒤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와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국내 항일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했다.
▲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대종교 활동(전시물 사진 재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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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는 발해의 고도인 중국 영안 동경성에서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하였다. 이 곳은 표면적으로는 농지개간사업을 하는 농장이었으나 실제로는 국외 독립운동기지였다. 그는 1911년 대종교에 입교한 이래 1934년 대종교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대종교 주요 인물로 활동하다가 1942년 일경에 체포되었다. 선생은 삶의 전부를 바쳐 조국과 민족을 위해 활동하다가 해방 2년 전 1943년에 순국하였다. 해방이 된 후 백범 김구 선생이 귀국한 후에야 안희제의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이 소상히 밝혀졌다.
백산상회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서울의 이회영 집안과 함께 망국의 시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가문으로 꼽는 경주 최부자집의 최준이다. 안희제의 제안으로 백산상회의 최대 주주가 된 그는 투자의 형식으로 거금의 독립운동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속적으로 기부했다. 동생들도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동생 최완은 임시정부에서 재정을 맡아 활동하다가 일제의 모략으로 국내에서 체포되어 결국 옥사했다(일본 경찰이 최준에게 서예를 배우고 싶다는 거짓말로 받아간 그의 글씨를 흉내내어 최준이 쓴 것처럼 편지를 조작해서 아버지가 와병 중이니 돌아오라는 가짜 편지를 보내어 국내로 잠입한 최완을 체포했다고 한다).
특히 최준이 해방 후 귀국한 백범 김구와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최준은 안희제가 임시정부를 핑계삼아 자신이 준 돈을 백산상회 사업 자금으로도 일부 쓰고, 전달하러 가는 비용으로도 쓸 거라 짐작하며 절반이나마 임시정부에 전달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백범 김구는 최준을 만나 '그동안 보내준 자금을 독립운동에 소중히 사용했다'고 감사를 표하며 안희제로부터 받은 자금 기록을 보여줬는데, 최준의 기록과 대조해보니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최준은 그 자리에서 안희제의 고향인 경남 의령 방향으로 절을 하며 김구 선생과 함께 통곡했다고 한다. 이 일로 안희제라는 인간을 재평가하게 되고 그가 한 독립운동의 참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역사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이 내용을 가르칠 때마다 울컥하곤 했는데 기념관에서 해설사 분의 설명을 들으며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산 시민과 부산을 찾는 모든 분들이 부산의 인물로 백산 안희제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부산 광복동, 남포동의 맛집과 BIFF광장과 가까운 곳에 전시관이 있으니, 꼭 찾아가보길 바란다.
시간 여유를 갖고 찾아가, 친절한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 독립운동 관련 지식을 이 한 단계 더 상승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념관에서 나올 때는 백산 안희제 선생과 선조들의 희생에 감사와 감동을 느끼면서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백산기념관 찾아가는 길-부산 지하철 중앙역이나 남포역에서 1km 정도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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