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건강] 삶 위협 한랭응집소병 국가 관리 희귀질환 지정 시급
찬 기운 조금만 돌아도 극심한 통증
해외 신약 국내 처음 도입됐지만
환자 연 수억원 부담해야 하는 실정
“치료 접근성 높여 주는 것이 중요”
60대 여성 C씨는 희귀 혈액질환인 '한랭응집소병'을 앓고 있다. 비정상적인 면역 반응으로 혈액 속 적혈구가 파괴되는 병이다. 이런 용혈 현상이 반복·지속되면서 체온 보다 조금만 낮은 온도에 노출돼도 남들의 10배 추위를 느끼고 치명적인 빈혈, 극심한 통증, 피로와 탈진, 호흡 곤란 등의 고통을 수시로 겪는다.
이런 환자들에겐 일상이 '온도 감옥'이다. C씨는 "항상 손발이 차서 여름에도 옷을 많이 껴입고 양말이나 털신을 신고 지낸다. 같이 사는 딸이 더워서 에어컨을 켜면 전기 매트를 깔고 솜이불을 덮고 잔다"고 했다. 대중교통 이용 시 에어컨 바람이나 마트 신선식품 코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도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다.
찜통 더위가 절정이던 지난 8일 정기 진료를 위해 대학병원을 찾았을 때도 C씨는 긴 소매 상의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안에는 바지까지 챙겨 입었다. 목에는 스카프를 둘렀다. 반소매 옷에 손 선풍기와 부채를 든 옆자리 대기 환자와는 딴 세상에 있는 듯했다.
희귀질환이다 보니 질병 정보와 치료 전문가를 찾기도 쉽지 않다. C씨는 5년간 수많은 병원과 진료과를 전전하며 ‘진단 방랑’을 겪었고 2021년 초에야 해당 병을 정확히 알게 됐다.
질병 분류 코드 조차 부여돼 있지 않아 국내 유병 환자 수 파악이 어렵다. 현재는 상위 질병 코드인 ‘자가면역성 용혈성 빈혈(D59.1)’에 포함돼 진료가 이뤄진다. 해외에서 보고된 발생률과 전문가 의견을 통해 국내에는 100여명 환자가 있을 걸로 추정된다.
그간 한국에는 이 병에 공식 허가된 치료제가 없었다. 증상에 따라 마약성 진통제나 스테로이드, 엽산 섭취 등 대증 치료를 하는 정도였다. 적혈구 수치가 떨어질 땐 임시 방편인 수혈로 버틴다. C씨는 “죽어야 끝나는 고통으로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다간 병이 악화돼 쉽게 목숨을 잃을 수 있다. 한랭응집소병 환자 10명 중 4명은 진단 5년내 사망하고 진단 후 여명은 평균 8.5년에 그친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최근 한랭응집소병에 유효성·안전성이 확보된 해외 신약이 국내 처음 도입됐다는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적혈구가 깨지는 용혈 현상을 억제하는 약제(수팀리맙)가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은 것. 환자 체중에 따라 용량을 달리하고 처음 2주간은 매주, 이후에는 2주 간격으로 평생 투여하는 주사제다. 6개월내 최소 1회 수혈 경험 있는 18세 이상 한랭응집소병 환자 대상 3상 임상연구에서 빈혈에 따른 피로 쇠약 숨참 두근거림 가슴통증 등의 증상이 크게 감소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연간 수 억원이 드는 이 치료제가 환자들에게 보다 빨리, 보편적으로 쓰이기 위해선 한랭응집소병이 우선 국가 관리 희귀질환에 지정돼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희귀질환으로 지정되면 약제의 건강보험 급여 시 산정특례 지원(본인부담 10%)을 받아 약값 부담을 덜 수 있다.
질병관리청의 희귀질환 지정은 넘어야 할 벽이다. 유병 인구 2만명 이하, 원발성 질환, 중증도 높고 완치 어려운 질환, 특이·독립적으로 진단이 가능한 질환, 진단·치료에 본인 부담이 높은 질환 등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해야 지정 가능하며 심사를 거쳐 매년 한 차례(11~12월) 이뤄진다.
질병 코드가 있으면 그나마 지정 요건 충족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현재 질병 코드가 없는 한랭응집소병은 차치하고, 질병 코드 있는 상위 질환인 ‘자가면역성 용혈성 빈혈’도 국가 관리 희귀질환으로 등록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희귀질환 지정이 되지 않아 치료제 사용에 제약을 받는 사각지대 환자들을 위해 희귀질환 지정 제도에 대한 개선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C씨는 올해 2월 절박한 심정으로 질병 코드 조자 없는 한랭응집소병의 희귀질환 지정을 신청했다. 질병 코드를 부여받는 방법도 있으나 통계청의 한국질병사인분류(KCD) 작업은 5년마다 이뤄지고 있어 2020년에 이어 2025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C씨의 경우 제약사의 배려로 지난 8일 해당 신약을 일단 무상으로 1차 투여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 환자들이 보편적으로 치료제 혜택을 보려면 희귀질환 지정이 우선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제약계 한 관계자는 “한랭응집소병 같은 희귀질환 치료제의 환자 접근성을 높이려면 급여 심사 시 산정특례 대상이 아닌 희귀질환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급여 검토를 하거나 연 1회 까다롭게 진행되는 희귀질환 지정 방식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준호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그동안 국내에는 한랭응집소병 치료에 허가된 약제가 없어 환자의 증상 완화 및 생존을 위한 미봉책으로 수혈이나 효과가 불충분한 미허가 약제를 고려해야 했다. 다행히 효과성과 안전성이 확인된 신약이 국내 도입됐는데, 비급여 상황에선 환자의 경제적 부담이 커 실질적 처방이 어렵다”며 안타까워했다. 장 교수는 이어 “희귀질환 산정특례 혜택이라도 받으려면 국가 관리 희귀질환으로 하루빨리 지정되는 것이 우선이며 환자들의 생존과 장기 질환 관리를 위해선 신약의 급여화가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희귀질환 미지정으로 치료 사각지대에 놓여 최근 이슈화된 경우는 한랭응집소병 외에도 ‘전신 농포성 건선’ ‘후천성(2차성) 중증 단장증후군’ 등이 있다.
한국희귀질환단체연합회 김진아 사무국장은 14일 “대상 환자 수가 현저히 적은 극희귀질환(유병자 200명 이하)이거나 중증도에 대한 구분 없이 진단명이 부여되는 경우, 중증도에 따라 해당 질환을 산정특례 지원 대상으로 지정해서 환자들의 치료제 접근성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식약처의 희귀의약품 허가와 질병청의 희귀질환 지정 절차가 별도로 이뤄지는데 따른 사각 지대 발생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됐다. 즉 신약이 희귀의약품으로 허가받아도 희귀질환 지정을 받지 못하면 국가 지원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김 국장은 “희귀의약품으로 승인되면 해당 의약품 사용이 필수적인 질환은 희귀질환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사진=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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