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참을 수 없는 ‘분석적 규격화’의 가벼움

2023. 8. 15.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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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사회과학자라는 자부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 활동을 하다가 정부나 공공기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때 당혹스러운 표현을 만나게 된다.

프로젝트 계획서 등을 작성할 때 나타나는 '공정(工程)' '진도율' '성과물' 등과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계획서에 첨부되는 공정표에는 프로젝트 기간별로 주요 역무를 언제부터 언제까지 완수하는지까지 표기하게 돼 있다.

그럼에도 이런 프로젝트의 계획서와 진도보고서 등을 작성할 때 말할 수 없는 초라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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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나름 사회과학자라는 자부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 활동을 하다가 정부나 공공기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때 당혹스러운 표현을 만나게 된다. 프로젝트 계획서 등을 작성할 때 나타나는 ‘공정(工程)’ ‘진도율’ ‘성과물’ 등과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사회과학자로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마치 아파트 건설이나 자동차 조립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느낌이다. 계획서에 첨부되는 공정표에는 프로젝트 기간별로 주요 역무를 언제부터 언제까지 완수하는지까지 표기하게 돼 있다.

정부와 공공기관뿐 아니라 기업 프로젝트도 해당 기관의 예산을 쓰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적절한 감독 절차와 감사의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또한 주먹구구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밀한 절차와 시간 계획이 필요하다는 데에도 공감한다. 이를 위해서는 뭔가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측정할 수 있는 중간 성과물이나 진척상황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들어간 노력을 시간과 비용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프로젝트의 계획서와 진도보고서 등을 작성할 때 말할 수 없는 초라함을 느끼게 된다. 예술작품이나 인문학 또는 사회과학적 성취는 투입된 시간(man-hours)이나 지금까지의 성과물로 측정된다고 보기 어렵다. 한 편의 시를 쓰려고 며칠째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지만 한 줄도 쓰지 못한 시인의 진도율은 영(零)일까? 공학적 진도율로 보면 그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렇다고 이 시인이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모든 감정과 단어를 모두 나열하고 자신이 쓴 시간을 말하면 이로써 노력과 고민의 흔적을 측정할 수 있을까?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져지고,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만이 우리의 노력과 성취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낯선 여자가 젊은 피카소를 알아보며 자신의 그림을 그려 달라면서 충분한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 피카소는 30초 정도의 시간으로 작지만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림값이 50만 달러라고 했다. 여자는 놀라면서 겨우 30초밖에 걸리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리는 데 30년과 30초가 걸렸다고 답했다. 예술가가 완성한 작품에는 그의 모든 일생이 녹아 있는 셈이다. 단순히 작업시간만을 측정해 값을 쳐준다면 그는 시급 페인트공에 지나지 않는다. 피카소가 평생 쌓아온 예술적 재능은 그의 몸에 엄청난 자본으로 체화돼 발현되고 있지만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노동가치설은 인적 자본(human capital) 개념이 없어 피카소의 노력을 30초의 노동으로 봤을 것이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턴은 그의 유명한 베스트 셀러 ‘굿바이 미스터 칩스’를 오래 고민하다가 불과 일주일 만에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필자도 한 달에 한 번 쓰는 이 칼럼을 쓰기 위해 한 달 내내 골머리를 쓴다. 그러나 막상 감이 잡히면 순식간에 써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고민하고, 골머리를 쓴 시간은 모두 무효인가?

교육 전문가들은 교수가 강의할 때 학생들의 사고력, 창의력, 문제해결능력, 정서 등을 고려하라고 권한다. 어떤 교수가 이런 것을 모두 생각하면서 강의할 수 있을까? 우사인 볼트가 100m 경주를 하면서 스타트, 보폭, 호흡, 상체 각도 등을 모두 생각해가면서 최적으로 맞춰서 뛸까? 창의적 활동을 공학적 분석으로 규격화하는 것은 평가와 측정의 방편은 될 수 있다.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예술, 학문, 가르침과 같은 창의적 활동은 분석적 결과를 재조립하는 행동이 아니다. 종합은 분석의 역순이 아니다. 해부한 물고기를 그 역순으로 꿰맨다고 물고기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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