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뜨락에서] 붉은 꽃으로 피어나고
여름 방학이면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과 함께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이른 오전이나 늦은 오후에 찌는 듯한 태양을 피해 쭉쭉 뻗어 있는 벼에 농약 치는 일이다.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며 놀고 싶은데 어린 내 힘이 천하장사보다 세다며 아버지는 비행기를 태웠다. 웃음과 칭찬에 고래 한 마리가 튀어나와 뭉게구름을 툭툭 건드리며 헤엄을 쳤는데 오래 가진 못했다.
농약 줄을 잡기 싫다며 고집이라도 피운 날이면 도끼눈을 뜬 아버지 품으로 비행기는 추락했고 고래도 먼바다로 떠나버렸다. 긴 세월 동안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아온 아버지는 몸의 저장된 시간으로 태양의 휴식시간을 놓치지 않았고 자연이 귀띔해준 소리에 부지런함으로 응답했다. 아버지 손은 자연의 것이었다.
동그랗게 감긴 노란 농약 줄과 잘 담아진 농약병들이 경운기에 올라탔다. 농약 물을 담을 큰 고무대야가 마지막으로 솟구쳐 태양을 덮어 버리면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손끝을 쳐다봤다. 뜨겁고 찬란한 화살빛 사이에 시원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소리를 발 동동 거리며 기다렸다. ‘달달달, 달달달’ 경운기 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벌렁거렸다.
은빛 물결과 수양버들의 작은 호흡. 찰나에 느껴진 어렴풋한 8월의 바람 냄새. 한 편의 동화 같던 날이었는데 잊고 살았구나 싶다. 그날의 이야기다.
개울을 가로질러 경운기가 다닐 정도로 겸손하게 만들어 놓은 얕은 길이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면 거센 물결이 사나웠고 물이 빠지면 물장난하기 좋은 장소였다. 농약을 치러 가는 길에 풍경처럼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손과 발이 생각을 하며 개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한여름 더위에 별들처럼 딱딱하게 구워지고, 농부의 발자국 따라 부드럽게 다져진 들판사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개울은 나로부터 도망가면서 체념을 건네줬다. 그랬었는데.
그날 나는 개울을 향해 겨울을 만난 듯 달렸었다. 꼬불꼬불한 아버지의 길 위에 제멋대로 자란 찔레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스치면서 ‘첨벙’ 개울물이 나를 삼키도록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사방으로 퍼졌다 일순간에 사라졌다. 뜻밖에도 논두렁에는 큰아버지 큰엄마가 있었다.
검정 고무신 배와 꽃잎 실은 나뭇잎 배를 개울물에 둥둥 띄웠다. 아른거리는 물빛 위에서 내 몸도 흔들흔들. 구름이 터져 비가 왔던 날이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뱃길이 된 경운기 길은 물길마저 시원했다. 위풍당당한 고무신 배와 연약함에 위태로웠던 나뭇잎배. 어느 순간부터 연약함에 정성을 쏟았기에 고무신 배는 홀로 개울물에 끌려갔다. 그로 인해 눈물 속에 아버지의 성난 얼굴이 흘러내렸고 개울물이 불어날 정도로 울어야 했다. 하늘을 보며 “하나님 고무신 한 짝을 잃어버렸어요. 찾게 해 주세요.” 울먹였었는데. “처음 배를 띄웠던 곳에서 고무신 배를 띄워 보는 게 어떠니?”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시작됐던 고무신 배와의 짧은 동행. 잘 흘러가던 고무신 배가 급물살에 휩쓸려 일순간에 사라져 버릴 때 ‘쿵’ 하고 내려앉은 심장이 무거워 다리를 휘청거리며 달려갔던 내가 생각나 웃음이 난다. 고무신 배는 완성체로 포개져 바위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물속에서 고무신을 끄집어내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칠 때 그 짜릿했던 순간. 세상은 모두 하나님 거였고 맑고 푸르고 반짝였다.
나는 아버지께 자랑하고 싶어 경쾌한 발걸음으로 논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개울가로 달려갈 때 흔들렸던 찔레나무 말이다. 커다란 뱀 한 마리가 흰 뱃가죽에 알록달록한 꽃무늬를 하고는 축 쳐져서 대롱대롱 매달려 죽어 있었다. 꼼짝달싹도 못한 채 비명을 질러댔었다. 우리 아버지는 바람이었다. 언제 왔는지 손을 뻗어 뱀의 꼬리를 잡더니 개울을 향해 힘차게 던져 버렸다. 뱀은 날아가고 맨발의 아버지 발등에는 붉은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날 사랑은 그렇게 붉게 피어났다.
장진희 사모(그이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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