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대통령과 광복회장의 극적인 악수
▶윤석열 대통령="김황식 총리님(이승만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이 하시는 일에 대해 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이종찬 광복회장="팔 걷어붙이고 돕겠다. 단순히 설립뿐 아니라 운영까지도 세심하게 살피겠다."
지난 9일 청와대 영빈관의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장에서 오간 대화다. 저간의 상황을 잘 모르는 분들에겐 생뚱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권 핵심부의 은밀한 사정을 잘 아는 이들에겐 심장 쫄깃한 장면이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회장의 아들은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다. 대광초등학교와 서울대 법대 동기로 세상이 다 아는 윤 대통령의 절친이다. 부친인 이 회장은 정치 입문 전부터 윤 대통령의 정치 멘토, 인생 멘토였다. 윤 대통령이 정계 투신 결심을 그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는 얘기도 있다. 겉에 나서진 않았지만 이 회장 역시 음지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둘의 만남에 왜 여권 인사들이 긴장했을까. 보수 진영의 대통령과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의 친손자인 광복회장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 회장은 6월 취임 이후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를 부정하는 세력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을 옹호하는 집단, 또는 독립운동을 고의로 폄하·왜곡하는 극우세력"이라고 했다. 1948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일본의 주장, 이설(異說)"이라고 일축했다(※사실 이 회장은 '1919년 건국론'이나 '1948년 건국론' 등 일체의 건국론을 배척한다. 다만 그 이전엔 왕정 복고였던 독립운동의 목적이 1919년 이후 공화정 수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때가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주장한다). 보수층 일각에선 곧바로 "반(反)대한민국 세력에 이용당할 수 있는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했다.
■
「 대한민국 원년 논쟁이 부른 긴장
"역사는 단절 아닌 과정"으로 해소
보수세력 내부 역사 전쟁 피했다
」
윤 대통령으로선 논쟁 자체가 부담스럽다. 그는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자유'를 매개로 "독립·건국·산업화·민주화 모두 독립운동"이라며 해묵은 논란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그런데 올 광복절 코앞에, 보수세력 내부에서 터진 갈등이 반가울 리 없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발화점이 이 회장이라니. 사실 더 큰 뇌관은 이승만기념관이었다. 이 회장은 "(기본적으로는 건립에 찬성하지만) 이 전 대통령을 신격화하는 '괴물 기념관'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념관 건립을 총력 지원하는 정부와는 결이 달랐다. 대통령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관련 부처 장관과 수석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통령실과 광복회 간 분위기가 일촉즉발"이란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떠돌아 다녔다. 긴박했던 순간 물밑 채널이 가동됐는지, 9일 오찬에서 반전이 찾아왔다. 윤 대통령은 이날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은 같은 편인데 왜 후세 사람들이 나누는지 모르겠다"며 접점을 찾아 나섰다. 그러자 이 회장도 이승만기념관 설립에 "팔을 걷어붙이고 돕겠다"고 했다.
무엇이 반전의 단초가 됐을까. 양측 사정에 밝은 인사들에 따르면 1919년과 1948년, 산업화와 민주화,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하는 현재를 모두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의 연속적 흐름과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인식이 절충의 기반이었다. 이런 시각이라야 미래의 통일한국 역시 '임시정부의 법통-1948년 정부 수립-통일 대한민국으로의 계승' 흐름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는 점도 감안됐다. 단절이 아닌 전체 흐름과 연속성 중시, 흑백논리가 아닌 포용과 절충의 묘수가 보수세력 역사 내전 회피의 열쇠였다는 뜻이다. 사실 이런 덕목이 적용될 분야가 건국 논쟁뿐이겠는가. 진영으로 갈린 대한민국, 꽉 막힌 여야 관계, 전·현 정부가 서로 삿대질만 해대는 잼버리 책임론 공방의 출구 찾기에도 이런 접근법이 좋은 힌트가 될 법하다.
서승욱 정치디렉터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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