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살해한 아들, 이해할 수 있을까
“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더러운 걸레야.”
오랜 시간 아버지로부터 학대 당한 아들이 계속된 인신공격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포크를 꺼내 아버지를 찌른다. 아들은 아버지의 숨이 완전히 끊기고 나서야 포크를 내려놓는다. 감옥에 간 아들 마르틴은 어느 날 자신을 면회 온 극작가 S를 만난다. S는 존속 살해를 주제로 글을 쓰는 중이다.
연극 ‘테베랜드’는 아버지를 죽여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청년 마르틴과, 존속 살해를 주제로 연극을 쓰려고 하는 극작가 S의 2인극이다. 우루과이 출신의 극작가 세르히오 블랑코가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쓴 작품으로 전 세계 16개국에서 공연됐다.
극작가 S는 연극 제작을 목적으로 마르틴에 접근하지만 마르틴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를 연민하게 된다. 인간 관계에 목마른 마르틴은 S가 자신을 이용해 글을 쓰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면회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S 외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S가 만든 연극에서 마르틴을 연기하는 배우 페데리코도 마르틴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실제로는 한 명의 배우가 마르틴과 페데리코를 모두 연기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지금 말하는 인물이 마르틴인지, 페데리코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교도소 철창을 재현한 무대도 모호함을 더한다. 이 철창은 마르틴이 갇혀 있는 교도소이면서 동시에 페데리코가 마르틴을 연기하는 무대다. 이런 모호함은 페데리코가 마르틴에 스며든 것처럼 누구라도 마르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누군가에게는 한없는 사랑으로, 누군가에게는 가장 깊은 증오로 기억된다.
제목 ‘테베랜드’의 ‘테베’는 고대 그리스 도시의 이름이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뒤 진실을 알게 되고 결국 자신의 눈을 뽑아버리는 신화 속 인물이다. 그렇다면 극 중 테베는 어떤 의미일까? S의 대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오이디푸스처럼 테베를 지니고 있어요. 조금 혼란스럽고 어두컴컴한 곳. 일종의 불가해한 영역 같은 거랄까.”
이 대목에서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의 땅 테베는 상처, 결핍, 원죄 등 인간의 가장 어두운 내면으로 풀이된다. 극은 테베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대신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의 테베는 무엇이냐고.
마르틴과 S가 나누는 대화 속 숨어있는 예술적 상징이 재미를 더한다. 이들의 대화 주제는 신화(오이디푸스), 문학(도스토옙스키), 기호학(롤랑 바르트), 정신분석(프로이트), 종교(성 마르틴), 음악(모차르트)을 넘나든다.
인터미션을 포함한 170분의 공연 시간을 단 두 명의 배우가 꽉 채워야 하는 만큼 대사량이 엄청나다. S를 연기한 이석준은 차분하고 안정적인 연기로 극을 이끌어나간다. 정택운은 그와 대비되는, 당장이라도 깨져 버릴 듯 거칠고 불안한 모습의 청년 마르틴을 표현했다.
배우 이석준, 정희태, 길은성이 S역을 맡았다. 배우 이주승, 손우현, 정택운이 1인 2역으로 마르틴과 페데리코를 연기한다. 공연은 다음 달 24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볼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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