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오늘도 가슴팍에 '로켓' 상자... '택배 없는 날' 못 쉰 쿠팡 기사들

박수림 2023. 8. 1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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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원하면 언제든 휴가 쓴다"는 쿠팡... 노동자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

[박수림, 유성호 기자]

 택배 노동자의 과로를 막기 위해 지정된 ‘택배 없는 날’에 쿠팡이 끝내 동참을 거부한 14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쿠팡 배송 캠프에서 택배 노동자가 배송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전자 온도계에 32.7도씨가 찍혔다. 태풍 기간 잠시 잦아들었던 폭염이 다시 엄습한 14일 오후, 쿠팡 퀵플렉스 택배기사(쿠팡 직고용이 아닌 대리점 소속 택배기사) 강민욱(37)씨가 연신 계단을 오르내리며 땀을 쏟아냈다.

'택배 없는 날'인 이날, 주요 택배사들은 배송을 멈췄음에도 강씨는 "평소처럼 오늘도 10~11시간을 일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로켓'이라고 적힌 상자들이 그의 가슴팍까지 켜켜이 쌓였다.

택배 없는 날(매년 8월 14일)은 고용노동부, 한국통합물류협회, 주요 택배사(CJ대한통운·한진·롯데글로벌로지스·로젠)가 지난 2020년 '택배 종사자 휴식 보장을 위한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정한 날이다.
 
 14일 오후 1시 30분께 전자 온도계에 32.7도씨가 찍혔다.
ⓒ 박수림
 
여느 택배기사들에게 이날은 달콤한 휴식을 즐기는 특별한 날이지만 강씨는 "중간에 밥 먹는 시간은 당연히 없고 정말 배고프면 빵을 사서 차 안에서 15분 만에 먹는" 똑같은 하루다. 그나마도 "오늘은 정신이 좀 없다"며 그는 점심을 걸러야 했다.

강씨처럼 쿠팡 퀵플렉스 택배기사인 A씨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는 "택배 없는 날은 (못 쉬는 건) 물론이고, 2년째 휴가 한번 간 적이 없다"며 "2회전(배송 구역을 두 번 도는 일)을 하면 11시간 정도 근무해야 하고 식사 시간이 부족해 편의점에서 산 김밥을 차에서 먹을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선택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배송을 마치려면) 무조건 2회전을 해야 한다"며 "(쿠팡 퀵플렉스 택배기사는 쉬려면 대체자를 세워야 하는데) 백업기사가 준비돼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여건이 안 되는 대리점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쿠팡 "1년 365일 택배 없는 날"... 기사들 "피눈물 나는 소리"
 
▲ '택배 없는 날' 일할 수 밖에 없는 쿠팡 택배 노동자 "사회적 합의 동참하라" ⓒ 유성호

 
 택배 노동자의 과로를 막기 위해 지정된 ‘택배 없는 날’에 쿠팡이 끝내 동참을 거부한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서 강민욱 쿠팡 택배 노동자가 택배를 배달하고 있다.
ⓒ 유성호
 
택배 없는 날을 앞두고 쿠팡의 불참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쿠팡 물류배송 자회사) 측은 지난 4일 보도자료를 통해 "쿠팡은 1년 365일 택배 없는 날"이라고 발표했다. "퀵플렉스 대리점에는 위탁 규정에 따라 휴가자를 지원하는 백업기사 인력이 있고 쿠팡이 직고용한 쿠팡친구(옛 쿠팡맨)의 지원도 있다"는 이유였다.

강씨와 A씨, 그리고 또 다른 쿠팡 퀵플렉스 택배기사 B씨는 "(쿠팡의 발표를) 신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강씨는 "최근 빗길에 넘어져 꼬리뼈가 부러진 한 동료는 2주 동안 일을 못했고, 또 다른 동료는 2박3일간 예비군 훈련을 가느라 일을 못했다"며 "(백업기사가 없어 누군가 이들의 일을 대체하지 못했고) 수익률(물품 배송을 달성한 비율)을 달성하지 못해 클렌징(쿠팡에 의해 배송 구역 회수)을 당했다"라고 떠올렸다.

B씨는 "(쿠팡은) 365일 기사가 원하면 쉴 수 있다고 홍보하던데 (해당 내용을) 퀵플렉스 택배기사들이 모여 있는 SNS 대화방에 공유하니 '피눈물이 날 것 같다'는 글이 올라왔다"라며 "일주일에 이틀만 쉬려고 해도 클렌징을 당하기 때문에 (그렇게 배송 지역을 회수 당하다보면 결국) 1년 내내 쉬게 될 수도 있다. 사실상 해고"라고 지적했다.

A씨 또한 "(쿠팡 측 발표대로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퀵플렉스 택배기사들이 전체의 몇 %나 될까"라며 "현장에서 일하는 퀵플렉스 택배기사들 사이에선 (쿠팡의 발표는) '말이 안 되는 사례'라는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사회적 합의기구' 논란도 같은 맥락
 
 택배 노동자의 과로를 막기 위해 지정된 ‘택배 없는 날’에 쿠팡이 끝내 동참을 거부한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서 강민욱 쿠팡 택배 노동자가 택배를 배달하고 있다.
ⓒ 유성호
쿠팡의 택배 없는 날 불참 논란은 '택배종사자 과로대책 사회적 합의기구(아래 사회적 합의기구)' 불참과도 이어지는 문제다. 사회적 합의기구는 택배기사의 연이은 사망으로 지난 2021년 택배 노사, 정부, 더불어민주당이 참여한 가운데 만들어졌는데, 쿠팡은 이 역시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가 내세우는 사회적 합의기구 불참 이유와 택배 없는 날 불참 이유는 맥을 같이 한다.

이날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는 "택배 없는 날은 원할 때 쉴 수 없는 대기업 택배기사들을 위해 민(주)노총이 주도해 만든 산업계 유일한 휴무일"이라며 "쿠팡, 마켓컬리, SSG 등 자체 배송 기사들이 있는 곳은 택배 없는 날과 무관하다"고 발표했다. 평소 쿠팡로지스틱서비스는 '퀵플렉스 택배기사들이 사회적 합의기구에 참여한 대기업 택배사의 기사들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강씨는 "앞서 말했듯 쿠팡이 주장하는 바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라며 "하루 속히 (쿠팡도) 다른 택배사들과 함께 사회적 합의기구에, 택배 없는 날에 동참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쿠팡의 말처럼 정말 근로 조건이 좋다고 하면 사회적 합의기구에 동참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라며 "(쿠팡만 불참하는 건) 전체 택배 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를 막기 위해 지정된 ‘택배 없는 날’에 쿠팡이 끝내 동참을 거부한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서 강민욱 쿠팡 택배 노동자가 택배를 배달하며 프레시백 회수 작업까지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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