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서 칼부림 예고가... 엄마에게 호신스프레이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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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림 기자]
지난 3일 분당 서현역 AK몰 칼부림이 발생했던 날, 트위터를 통해 우연히 다른 이가 찍은 사건 현장 영상을 보게 됐다. 제 잘난 듯 당당하게 걸어가는 가해자의 모습보다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마도 피해자가 내고 있을 고통스러운 절규에 숨이 턱 막혔다.
'60대 여성 A씨'. 사건 직후 몇 글자로 보도된 피해자의 신상은 나를 더욱 힘겹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연령대인 엄마가 불현듯 피해자에 투영돼 보였기 때문이다.
▲ 지난 7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한 대형 백화점 인근에 지난 3일 발생한 '분당 차량 돌진 및 흉기 난동'으로 사망한 피해자를 추모하는 꽃다발과 커피 등이 놓여 있다. |
ⓒ 연합뉴스 |
사건 이후 대전에 사는 엄마에게 자주 안부 전화를 걸었다. 당장 내일부터 못 볼 것 같은 사람처럼 이상한 여운이 남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그저 조심하라'는 당부였지만, 그것만이라도 자주 해야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런 나에게 한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테러리스' 사이트 링크를 공유해 주었다. 대학생 4명이 만들었다던 이곳 사이트에는, 온갖 SNS를 통해 올라 온 칼부림 예고를 모아서 지역별 좌표로 찍어 만든 범행예고가 빼곡히 올라와 있었다.
▲ 01ab(공일랩) 팀이 만든 범행예고알림 '테러리스' 사이트 (사진=사이트 화면캡쳐) |
ⓒ 01AB |
곧장 찾아가 열어 본 사이트(https://terrorless.01ab.net/)에는 내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수많은 좌표들이 다닥다닥 찍혀 있었다. 좌표가 찍힌 지역도 전국으로 다양했고, 범죄 예고글의 원본 링크가 붙은 '제보된 위협 목록'도 볼 수 있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 6일 서비스를 시작한 이 웹사이트는 단 3일 만에 약 25만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내 눈은 자연스레 엄마가 사는 대전으로 향했다. 그곳에도 이미 2건의 칼부림 예고가 있었다. 곧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대전에서도 칼부림 예고가 있었대. 조심해."
엄마는 잠깐의 침묵 후 '어디서?'라고 되물었다. 엄마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지금껏 해온 말들이 너무 무책임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조심하라는 걸까. 60대에 들어선 중년의 엄마가 매번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 확인을 통해 칼부림 예고를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는 걸까.
지금도 온라인에선 칼부림 예고글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다행히도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똑같이 온라인 상에서 칼부림 예고 지역들을 빠르게 확인하고 서로의 SNS을 통해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온라인에 익숙치 않은 중장년 세대는, 그걸 잘 알기 어려운 상태에서 너무나 실체 없는 두려움에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모든 칼부림 예고글을 한 사이트에 정리해 놓은 '살인예고 지도'를 통해 이전보단 쉽게 주의할 수 있게 됐지만, 이에 대한 정보조차 접하기 쉽지 않은 이들은 여전히 옅은 공포를 안고 집 밖을 나서고 있다.
우리 엄마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칼부림 예고 글이 온라인 상에서 우후죽순 늘어날수록, 엄마가 느끼는 두려움과 무기력함도 한층 더 커질 게 분명했다. 유독 겁이 많은 우리 엄마. 일전에 행인이 별 뜻 없이 들고 있던 검정 펜을 흉기로 착각해 심장이 덜컥했다는 엄마의 일화가 떠올라 마음 한 켠이 시큰해졌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듯 칼부림과 같은 범죄 양상은 결코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난 엄마를 위한 방안을 찾아야 했다. 하나 뿐인 딸로서 이젠 '조심하라'와 같은 무책임한 말만 건네고 싶지 않았다.
▲ ‘오리역 부근에서 칼부림을 하겠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고 경찰도 죽이겠다’는 범죄 예고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가운데, 지난 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오리역 구내에서 방패, 삼단봉, 방검복 등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순찰을 강화하고 있다. |
ⓒ 권우성 |
결국 어젯밤 엄마에게 내가 쓰는 것과 똑같은 스프레이를 주문해 주었다. 칼부림 예고를 미리 확인하기 어렵다면, 언제 어디서든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엄마만의 무기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내가 주짓수로 배운 몇 가지 호신술도 알려주었다. 엄마는 처음엔 민망해했지만 금세 어린 학생처럼 잘 따라 해 주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위험 상황에서 '재빨리 도망치는' 것이다. 다만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상황에선 내가 준 스프레이와 호신술로 조금이나마 모면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엄마 곁을 지켜줄 수 없으니 말이다.
나는 요즘 자주 '안전의 연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가 흉흉해질수록, 연대는 더욱 끈끈해지고 단단해져야 한다. 연대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도필요하다.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엔 연대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온라인에 취약한 중장년층과 어린 아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 이 외에도 안전에 두려움을 갖는 모든 사람이 그에 해당한다. 연대를 형성하는 힘은 우리 모두 갖고 있다고 믿는다. 내가 엄마에게 건넨 작은 스프레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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