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토대로 인문학 잡담을 나눈다면

박순우 2023. 8. 1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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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지음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를 읽고

[박순우 기자]

언제부턴가 누군가 물으면 수줍게 '저 과학 좋아해요', '과학책 자주 봐요'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과학과는 상관 없는 삶을 살던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기 시작한 건, 순전히 첫째 때문이었다.

첫째는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부터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다. 자연관찰 책을 닳도록 꺼내와 내게 안기는 통에 읽고 또 읽어줄 수밖에 없었다. 동물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책을 읽어주면 읽어줄수록 이상하게 자꾸 호기심이 생겼다. 그게 과학으로 가는 나의 첫 발이었다.

도서관에서 처음 빌려와 읽은 과학책은 나탈리 앤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였다. 400쪽이 넘어가는 책이었고, 과학 지식이 전무한 사람이었지만 꽤 잘 읽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자는 과학이 주는 재미가 얼마나 대단한지, 과학의 세계가 얼마나 우아하고 흥미진진한지를 알려주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에세이처럼 편안하게 읽히는 데다 전반적인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과학에 대한 흥미를 이어가기에 제격이었다.

이어 도전한 책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였다. 과학은 아름다운 학문이고, 과학자들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동시에 인간이라는 미물이 우주의 시선에서 얼마나 먼지에 불과한지도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인문학에도 그리 조예가 깊은 편이 못 된다. 인문학과 과학이 어떤 관계인지도 사실 잘 몰랐다. 어쩌면 잘 몰랐기에 과학을 받아들이면서, 마치 세상을 처음 탐구하는 어린아이처럼 흡수할 수 있었다. 

과학커뮤니케이터라 불리우는 이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내게 과학은 태양계 바깥에 있는 행성 같은 머나먼 존재였을 것이다. 최초의 과학커뮤니케이터라고도 부를 수 있는 데즈먼드 모리스가 대중을 향해 <털 없는 원숭이>를 썼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학문적인 내용을 누구나 알기 쉽게 서술하며, 과학을 학자들만의 것이 아닌 대중의 것이 되도록 만든 기념비적인 책이다. 인간을 한낱 원숭이라 부른 것도 논쟁을 촉발시킨 원인이었다.

1967년 출간 당시만 해도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후 많은 학자들은 과학커뮤니케이터를 자처하며 대중과학서를 내기 시작한다. 이 책이 없었다면 잘 알려진 <이기적 유전자>나 <사피엔스> 등의 책은 아직 쓰이지 않았거나, 훨씬 먼 훗날 쓰였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부터 한국의 과학자들도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책을 내거나 다양한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물행동학자 최재천이나 물리학자 김상욱, 뇌과학자 정재승, 천문학자 심채경 등은 대표적인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이다. 나는 이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과학에 이처럼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까.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 지음, 돌베개 출판
ⓒ 돌베개
 
이런 나를 잘 알고 있는 지인이 내게 얼마 전 한 권의 책을 추천했다.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였다. 책 제목을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인이 왜 추천을 했는지도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경제학도라 그의 책이 나오면 당연히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읽지 않았는데, 이번 책 제목을 보고는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다.

그렇게 펼쳐든 책에는 인문학계에 대한 비판이 제법 많이 들어 있었다. 인문학은 과학이 발전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발전한 학문이다. 과학이 발전한 건 그에 비해 짧지만, 최근 몇 백년 동안 이룬 업적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유시민은 과학이 많이 발전한 지금부터는 인문학이 과학적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의 한계를 넓히기 위해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한 더 가치있는 이야기를 인문학이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사실 그동안 인문학과 과학이 잘 융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른 분야라고만 생각했지, 두 분야의 학자들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통섭적인 책이었다.

<사피엔스>나 <총, 균, 쇠>, <WEIRD> 등은 방대한 역사와 과학적 사실이 한데 버무려져 있는 책이다. 인문학적 지식의 토대가 허술한 내게 과학책이 인문서처럼 여겨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과학의 끝에는 꼭 인문학이 함께 있었다. 과학책을 읽고 나면 인문학적 관점과 통찰이 절로 맺혔다. 물질을 탐구하는 과학 역시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기에. 과학책을 펼쳐볼 때마다 인문학적 사색에 빠지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

내가 접한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과학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 끝에 질문은 결국 인간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과학자지만, 누구보다 인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현실의 벽에 가로막힐 때마다 왜 인문서보다 과학책을 펼쳐들었는지, 이제야 스스로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단단한 팩트 위에 해석 쌓는 걸 좋아한다. 육아를 하면서도, 아이가 가진 본능과 기질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하면 생물학책을 펼쳐들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 싶으면 뇌과학책을 열어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기억을 저장하며, 무엇을 선호하는지를 알아갔다.

우주의 기원과 지구의 탄생과 생명의 시작을 알고 지도를 그려가야, 비로소 단단한 토대 위에 성을 쌓는 기분이 들었다. 내게 과학은 그런 시작점을 알려주는 귀한 학문이었던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라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진리라는 게 없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진리인 것을 가르쳐주는 학문이 내게는 과학이었다. 그래서 과학에 대한 나의 지적 호기심은 늘 충만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전공을 하고 싶을 만큼.

유시민의 글은 날카롭지만 겸손했다. 바보를 겨우 면한 사람의 과학 이야기라며, 이런 책을 낸 걸 부끄러워 했다. 하지만 나는 오랜만에 그의 순수함을 본 것 같아 기뻤다. 오래 전 그의 책에는 그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지식 소매상'.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수식어가 떠올랐다.

덕분에 과학교양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더 깊은 과학을 이해하게 됐다. 내가 차마 건드리지 못한 화학이나 양자역학을 좀 더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다. 비록 그는 부끄러운 얕은 이해라 일컬었지만, 문과인 내가 그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이해한 것에 감사하다. 더 많은 과학책을 열어볼 용기가 생겼고, 충만해진 호기심에 가슴이 뛴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으로 가는 창구가 되길 바란다. 과학은 더는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을 알면 훨씬 효율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과학자들의 태도를 배우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힘과,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세가 생긴다. 과학을 깊이 들여다 보면, 사회적인 논쟁 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이 소모적이라는 걸 알게 된다.

유시민은 자신이 너무 늦게 과학을 들여다본 것을 후회했다. 답이 아닌 것을 정답이라 여기며 헛되이 보낸 시간과 열정을 아쉬워했다. 아마도 그 아쉬움이 이 책을 쓰게 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의 진심이 곳곳에 닿아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과학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렇게 과학의 토대 위에 함께 인문학 잡담을 나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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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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