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의 영웅, 월드컵에선 역적... 만치니의 명암
[이준목 기자]
유로 2020에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이 전격 사임했다.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지난 8월 13일(현지시간) 공식 채널을 통해 만치니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만치니는 이탈리아 축구계의 레전드이자,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현역 시절에는 스트라이커로 이탈리아 볼로냐-삼프도리아-라치오 등에서 활약했고, 특히 대부분의 경력을 보낸 삼프도리아에서는 15년간 566경기에서 171골을 기록하며 최다 출장-최다골 등 구단의 각종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으며 1996-1997시즌에는 세리에A 올해의 선수(MVP)까지 수상했다.
삼프도리아는 전통적으로 빅클럽과는 거리가 먼 중위권 정도의 팀이었고 지난 시즌에는 2부리그로 강등까지 당했다. 1989-1990시즌 세리에A 우승을 비롯하여 삼프도리아가 거둔 주요 대회 우승 기록은 모두 '만치니 시대'에 달성했고, 이 기록이 2023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만치니의 위엄을 보여준다.
만치니는 2001년 은퇴 이후 피오렌티나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했고, 라치오-인터밀란-맨체스터 시티-갈라타라사이-제니트 등 유럽 여러 명문클럽들의 지휘봉을 잡았다. 인터밀란에서는 리그 3회 연속 우승을 이끌었고, 맨시티에 44년 만의 리그 우승(2011-2012시즌)을 선사하며 팀 전성기의 초석을 닦는 등, 지도자로서도 승승장구했다. 특히 현역 시절 다혈질로 누구보다 유명했던 만치니는, 정작 지도자가 되어서는 마리오 발로텔리나 아드리아누같은 악동들을 관용으로 품어주는 덕장의 면모로 축구팬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보살'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지도자로서 줄곧 클럽팀의 감독만을 역임했던 만치니는 2018년 모국인 이탈리아의 지휘봉을 잡게 되며 최초로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됐다. 당시 이탈리아는 전임 잔 피에로 벤투라가 2018 러시아월드컵 유럽지역 예선에서 무려 60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초대형 사고를 치고 경질되면서 축구계 전체가 위기의식이 팽배한 비상 상황이었다. 월드컵 우승횟수만 4회로 브라질(5회) 다음이자 독일과 공동 2위였던 이탈리아 축구의 자존심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만치니 역시 이탈리아 대표팀을 맡기 전 클럽무대에서 연이은 성적부진과 경질을 거듭하며 지도자 커리어가 하락세를 타고 있던 시점이었다. 또한 대표팀을 지휘한 경험도 전무했기에 많은 이들이 성공 가능성에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만치니는 부임과 동시에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꿨다. 만치니는 노쇠한 이탈리아에 과감한 개혁을 선언하며 그동안 이름값에 밀려 대표팀에서 중용되지 못했던 유망주와 흙속의 진주들을 대거 발탁하며 이탈리아 특유의 실리축구를 재건했다.
이탈리아는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과 함께 2018년 우크라이나와 평가전 무승부를 시작으로 2021년 유럽축구연맹(UEFA) 네이션스리그 4강 홈 경기에서 스페인에 패하기까지 무려 'A매치 37경기 연속 무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최다 연속 무패 기록은 물론이고, 종전 브라질과 스페인이 보유하고있는 35경기 연속 무패를 넘어선 세계 신기록이었다.
정점은 유로 2020 우승이었다. 만치니의 이탈리아는 예선에서 10전 전승으로 압도적인 성적으로 본선진출을 일찌감치 확정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1년 연기되어 2021년에 열린 유로 2020 본선까지 무패 행진을 이어간 끝에 결승에서는 잉글랜드를 승부차기로 꺾고 마침내 유럽 챔피언에 올랐다.
이탈리아 대표팀이 메이저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것은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 15년만이었고, 유로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53년 만의 경사였다. 특히 바로 직전 월드컵에서 예선탈락의 수모를 겪었던 아주리 군단을 3년 만에 우승팀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서사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사실 만치니 감독은 현역 시절 클럽에서의 명성에 비하여 대표팀에서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선수였다. 통산 A매치 36경기 출전 4골에 그쳤고, 월드컵 출전도 1990년 대회 한 번에 불과했다. 선수 시절 못 다 이룬 영광을 지도자로서 완벽하게 풀어낸 만치니는 이탈리아를 부활시킨 영웅이자 구세주로 등극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 되어 만치니와 이탈리아에게는 또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다음 목표는 월드컵에서의 명예회복이었다. 만치니 체제에서 유럽 챔피언으로 등극한 데다 막강 전력을 갖춘 이탈리아의 월드컵 본선 무대 복귀는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2022 카타르 월드컵 유럽 예선 C조에서 휘청거리기 시작하더니 한 수 아래로 꼽히던 스위스에 월드컵 직행 티켓이 주어지는 조 1위 자리를 내줬다. 또한 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피파랭킹 67위에 불과했던 약체 북마케도니아와의 단판 승부에서 0-1로 충격패를 당하는 '팔레르모 참사'가 벌어졌다. 결국 만치니의 이탈리아는 플레이오프 파이널까지도 가보지 못하고 '사상 초유의 월드컵 2회 연속 본선 진출 실패'라는 희대의 불명예 신기록을 세웠다.
유로 우승 때만 해도 이탈리아 축구를 살려낸 '신'으로 대접받던 만치니 감독은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전락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임 이후 단 2패, 특히 월드컵 예선에서는 마케도니아전 패배가 유일했기에 내용에 비하여 운이 없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결과는 엄연히 탈락이었다. 만치니 감독 부임 이후에도 안정된 수비에 비하여 해결되지 못한 고질적인 공격력의 한계,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벌어진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 전통적으로 탁월한 선수단 구성능력에 비하여 단기전에서 유연하지 못한 만치니 감독의 전술운용과 임기응변의 부재가 결합되어 초래한 결과였다.
놀랍게도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월드컵 예선탈락에도 불구하고 만치니 감독을 유임시켰다. 벤투라 감독 때와는 달리, 만치니에게는 유로 2020 우승의 후광과 선수단의 확고한 지지가 뒷받침되어 있었고, 그를 대체할 만한 감독도 마땅치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계속됐다. 네이션리그에서 라이벌 독일에 5골을 내주며 대패하고, 약체인 오스트리아에 덜미를 잡히는 등 들쭉날쭉한 행보가 이어졌다. 올해 시작된 유로 2024 지역예선 첫 경기에서는 3년 전 본선 결승전에서 이겼던 잉글랜드에게 경기 내용에서 압도 당한 끝에 1-2로 패하며 또 한번 체면을 구겼다. 만치니 감독을 향한 불신의 여론도 크게 높아졌다.
압박에 시달리던 만치니 감독은 결국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한 채 이탈리아 감독직 사임을 발표했다. 만치니 감독은 유로 우승 이후 새로운 선수 발굴에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물론 이는 최전방 공격수 등 몇몇 포지션에서 월드클래스급 선수를 찾기 어려워진 이탈리아 축구계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치니 감독의 공격전술과 선수운용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았고, 지난해 카타르월드컵 탈락 이후 축구협회의 전폭적인 지원과 비호를 받았음에도 이제야 뒤늦게 사임했다는 점에서 만치니 감독의 책임론도 큰 편이다.
현재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후임 대표팀 감독으로는 지난 시즌 나폴리를 33년 만의 이탈리아 세리에A 정상에 올려놓은 루치아노 스팔레티 전 나폴리 감독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스팔레티 감독은 지난 시즌 이후 나폴리 감독직을 사임하며 이탈리아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다.
또한 만치니 감독은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올라 거취가 주목되고 있다. 사우디는 만치니를 영입하기 위하여 약 연봉 1800만 유로(약 262억 원)에 이르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한번 혼돈의 시대를 맞이한 이탈리아 축구의 운명이 어디로 흘러갈지 축구팬들의 시선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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