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빠빠'에 담긴 1960년대 가정 풍속도

김규종 2023. 8. 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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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로맨스 빠빠>

[김규종 기자]

 영화 <로맨스 빠빠>의 한 장면.
ⓒ 로맨스 빠빠
 
지나간 시절의 영화를 보는 일은 유쾌한 노릇이다. 그 시대의 인간과 사건, 관계와 인연, 시대의 양상과 변화를 우리 시대와 견줘보는 작업이 적잖게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제는 전설로만 남은 신상옥 감독(1926-2006)이 34살 청춘에 아내이자 동갑내기 배우 최은희(1926-2018)와 만든 영화 <로맨스 빠빠>도 예외가 아니다.

<로맨스 빠빠>는 1960년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개봉되었고, 1961년에 제1회 '한국 최우수 영화상(대종상 전신)'을 받았다. 이 영화는 당대의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한 것이고, 서울에서만 10만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또한 신상옥이 설립한 신필름의 첫 번째 영화로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호평받은 덕분에 이후 신필름은 한국 최고 영화사로 도약한다.

<로맨스 빠빠>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어머니 역으로 나온 주증녀와 맏딸로 나온 최은희가 1926년생으로 동갑이었다. 아버지 배역의 김승호는 1918년생으로 사위 역할의 김진규보다 다섯 살 연상이다. 차남 배역의 신성일은 1937년생으로 <로맨스 빠빠>가 그의 데뷔작이다. <로맨스 빠빠>는 196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연 첫 작품으로 기록된다.

연극처럼 보이는 영화

1960년대 영화를 보다 보면 참 낯설군, 하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있다. <로맨스 빠빠>에서 관객은 첫 번째 장면부터 이것을 확인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김승호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푸근한 웃음을 머금고 등장한다. 나이가 52살이고, 이 집의 가장이며, 이젠 노인이 다 됐다고 말한다. 52살 중년의 노인이 일상화된 1960년대 한국 사회가 이채롭다.

뒤이어 어머니 주증녀가 자신은 45살인데, 아직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식으로 대졸 여성이자 집안 살림의 기둥인 맏딸 음전과 그녀의 애인이며 기상대 직원인 전우택(김진규)이 자신을 소개한다. 이어서 대학생이자 영화감독 지망생인 장남 어진(남궁원)과 대학생이자 둘째 딸인 곱단(도금봉)이 나온다.

차남이자 고3 재학생 바른(신성일)이 자기를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막내딸이자 고교생인 이쁜(엄앵란)이 발랄한 모습을 선보인다. 마치 한 편의 연극이 시작될 때 등장인물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것은 영화 내용이 관객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에 유명 배우들로 흥행의 승부를 걸려고 했던 신상옥의 고육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로맨스 빠빠>에서 쓰이고 있는 자녀들의 이름은 그 시대를 호명하는 듯하다. 얌전하고 점잖다는 뜻을 가진 '음전'이, 너그럽고 덕행이 높다는 의미의 '어진'이, 얼굴이 곱다는 뜻의 '곱단'이, 행실이 곧거나 반듯하다는 뜻의 '바른'이, 그리고 생김새가 어여쁘고 귀엽다는 의미의 '이쁜'이가 그들이다. 요즘엔 완벽하게 실종된 한글 전용 이름이다.

<로맨스 빠빠>에서 확인하는 사랑의 시각차
 
 영화 <로맨스 빠빠>의 한 장면.
ⓒ 로맨스 빠빠
 
영화제목과 달리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로맨스)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박봉에 시달리는 보험회사 계장이며, 5남매의 자상한 아버지이자, 어진 아내의 남편인 그가 남모르게 사랑을 꿈꾼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제목이 <로맨스 빠빠>이기에 관객들은 아버지의 감춰둔 사랑이나 느닷없는 일탈을 은연중에 기대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객석의 요구를 실현하는 방법은 색다르게 관철된다. 대학을 다닌다면서 실제로는 영화사에서 감독의 길을 걷는 어진이 어느 날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가족들에게 소개한다. 그가 설정한 관계는 지독하게 오래되고 낡아빠진 '클리셰(cliche)'에 기초한다.

가정과 아내와 아이가 있는 매력적인 남자가 있다. 그를 사랑하는 젊고 어여쁜 처녀가 있다. 처녀와 유부남인 그들은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마침내 그들은 동반자살로 세상과 작별하려고 한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알려진 <사의 찬미>(1926)로 유명한 윤심덕과 목포의 거부(巨富) 아들이자 극작가 김우진의 애틋한 사랑과 동반자살이 떠오른다.

어진의 시나리오를 읽던 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선다. 그는 다른 설정을 제안한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중년의 시인이 있다. 예술가들이 즐겨 쓰는 빵모자를 쓴 시인 앞에 문학을 열망하는 아리따운 젊은 처녀가 앉아 있다. 그는 처녀의 사랑을 받아주기엔 너무나 나이가 많음을 자책하지만, 처녀는 그런 것에 전연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이 무르익어갈 무렵 이번에는 어머니가 펄쩍 뛰고 반대한다. 그녀는 조선시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들고나온다. 인물과 가문, 바느질이며 음전하기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규중(閨中)의 처녀가 어머니 몰래 어떤 도령을 사랑한다. 하지만 도령은 마음이 변해 하룻밤 사랑으로 그들 관계를 치부하고 몰래 달아나려 한다.

문제는 아버지의 로맨스가 아니라, 장성한 혹은 커가고 있는 아들딸의 로맨스가 영화의 핵심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다. 음전은 아무런 장애도 없이 사랑하는 남자와 혼인한다. 어진은 부모 몰래 영화사를 출입하면서 대학을 중퇴하지만, 어느새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곱단이는 사랑보다 친구들의 우정을 갈구하는 발랄한 여대생이다.

고교생 바른이는 레슬링 서클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아버지에게 힘자랑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막내딸 이쁜이는 통학하는 버스 안에서 남학생의 예사롭지 않은 관심 대상이 되며, 마침내 애끓는 사랑의 편지를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서(戀書)를 찢어버리고, 오히려 아버지가 그것을 아쉬운 마음으로 이리저리 붙여보려고 애쓴다.

영화는 아버지의 입을 빌려서 사랑의 편지를 말한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편지를 받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극악무도한 일제 강점기에도, 해방공간과 6.25 한국동란 기간에도, 전후 베이비 붐 시절에도 수많은 청춘이 사랑을 나누지 않았겠느냐, 하는 암시가 그의 말에 내재해 있다. 그래서 그는 막내딸이 함부로 찢어버린 편지에 애달픈 것이다.

<로맨스 빠빠>에 그려진 당대 생활상
 
 영화 <로맨스 빠빠>의 한 장면.
ⓒ 로맨스 빠빠
 
영화를 보면서 체제 선전용 영화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드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곱단이의 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친구들 집에는 모두 자가용과 피아노가 있는데,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요." 그녀가 다니는 대학은 우정 이대(梨大)일 것이지만, 1960년에 여대생들 집에 하나같이 피아노와 자가용이 비치돼 있다는 얘기는 상상하기 어렵다.

처참한 국내정세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권력 유희에 노골적으로 빠져들었던 노회한 정객(政客)이자 미국의 허수아비 이승만! 그자가 12년 동안 인도했던 한국의 정치는 물론이려니와 경제가 얼마나 참혹한 수준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여대생들의 집에는 자가용과 피아노가 있었다니, 체제 선전용 영화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대목도 있지만 <로맨스 빠빠>는 당대의 어려운 사회 상황을 스치듯 보여준다. 어진의 시나리오와 관련해서 잠시 나오는 이야기는 '검열'이다.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은 그 시대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건이며, 따라서 검열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대화가 나온다. 60년 전 한국의 사회 윤리적인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로맨스 빠빠>는 노동자들의 '감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오늘날 '해고'라는 용어가 훨씬 더 익숙하게 들리는 감원은 두 사람과 관련된다. 전혀 도둑 같지 않은 도둑이 단란한 가정집에 들어온다. 아버지 혼자 술을 마시려던 한밤중에 뭔가 가져갈 게 없을까, 해서 은밀하게 들어온 도둑. 아버지는 그와 흔쾌하게 술잔을 주고받는다.

도둑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처한 사정을 털어놓는다. 자식이 벌써 열둘이나 되는데, 아내는 지금 만삭이라 언제 열세 번째 아이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얘기다. 그런데 자신은 감원 돌풍 때문에 유일한 돈벌이 수단이었던 수위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미역국을 끓일 형편이 못 돼서 도둑질하게 됐다는 도둑의 말에 미역을 찾는 집주인이라니!

감원은 비단 도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랜 세월 보험회사 계장(팀장)으로 근무했던 아버지에게도 해고의 칼날이 불쑥 찾아든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어떤 전조도 없이 감원의 총탄이 아버지의 심장을 향해 날아든다. 그는 맏딸의 혼수를 위해 12개월 치의 봉급을 가불(假拂)한 상태다. 과연 그는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할 것인가?!

<로맨스 빠빠>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여기서부터다. 아내는 물론 가족 전체에게 해고를 속이고 평상시처럼 출근하여 도심 곳곳을 헤매고 다니는 무기력한 가장. 그런 사실을 우연히 알아챈 장남이 아버지에게 버스요금과 점심값을 전하는 장면. 전당포 구실을 함께하는 귀금속 가게에서 시계를 저당 잡혀 봉급처럼 가져다주는 남편.

맏딸 덕분에 해고 사실을 알게 된 가족 전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집안의 어려운 처지를 극복해나가는 장면. 그리하여 맞이한 가장의 53번째 생일잔치. 생일 케이크와 노래가 흐르고, 자식들이 찾아온 시계가 아버지에게 전달되는 훈훈한 장면은 그야말로 최루(催淚)를 위한 장면 아닌가?! 한국형 가족 드라마의 전형을 선사하는 영화 <로맨스 빠빠>!

글을 마치면서

<로맨스 빠빠>를 관통하는 단일한 사건과 갈등은 없다. 마치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단막 드라마처럼 영화는 몇 가지 작은 사건을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묶어내는 일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관객에게 절실한 영화의 긴장도나 몰입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로맨스 빠빠>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결말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지만 <로맨스 빠빠>에 실린 두 세대 이전의 사회상과 인간군상의 모습은 우리의 관심을 자극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저출산과 인구감소 문제는 다른 나라 얘기다. 한밤중에 찾아든 도둑은 흥부처럼 12남매의 아버지이자 가장이며, 영화 주인공 역시 5남매를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저출산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남자 나이 50세가 넘어지면, 여자가 45살이면 이미 중년을 넘어서 초로의 노인으로 대접받았던 시대가 1960년대였다. 오늘날 같으면 전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수용된다. 요즘 청년의 개념을 물으면 대개 20대부터 50대까지를 거명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52살 먹은 노인이라니, 격세지감(隔世之感)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다!

반면에 1960년대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회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도 있다. 해고와 재취업 문제다. 노동자를 하루아침에 거리로 도둑으로 내모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아무런 사회보장이나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지지 못한 전형적인 후진국 양상이 영화에서 전개된다. 동시에 해고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감내하기 어려운 날카로운 비수다.

2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에 이르는 나이의 감독과 배우들이 모여서 만든 영화가 <로맨스 빠빠>였다. 그들은 실제 현실처럼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것 같다. 배역들의 역할과 분위기, 그들의 갈등과 관계가 손에 잡힐 듯한데, 그 어디에도 폭력적이거나 열패감 혹은 절망으로 얼룩지고 무너져내리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면이 <로맨스 빠빠>의 치명적인 결함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앞이 보이지 않던 신생 한국의 칠흑 같은 사회-경제-정치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따사롭고 온정적이며, 웃음이 넘치는 명랑사회와 가정을 그리는 데 영화가 전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웃음이 넘치는 장면에 드리워진 슬픔과 어둠 그리고 깊이가 아쉬운 영화가 <로맨스 빠빠>다. 하지만 그런 질곡과 난제를 해결하면서 우리 영화는 1960년대 르네상스의 장정(長征)에 돌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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