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인사이드]오펜하이머와 한국

전경주 2023. 8. 1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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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가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J.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는 미국 핵 개발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하기 직전, 전쟁을 끝내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짊어져야 했던 과학자의 고뇌를 조명하고 있다. 이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여전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아틀라스 엔터테인먼트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핵폭탄을 만드는데 참여하기로 결단했던 것은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보고자 했던 학자적 열망이나 정치적 야심 때문이 아니었다. 나치 독일이 먼저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연합군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핵물리학 수준과 히틀러의 공격적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미군의 군사적 우려에 공감했던 탓이다. 오펜하이머가 독일 괴팅겐(Gottingen) 대학에서 유대인 교수의 지도하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바로 교편을 잡았던 때였다. 그와 함께한 과학자들은 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온 유럽 이민자 출신들이었다.

역사적 아이러니는 미국 과학자들이 독일 과학자들과 보이지 않게 경쟁하며 만들어낸 그 원자폭탄을, 미군은 정작 일본에 떨어뜨렸다는 점이다. 1944년 말, 미국 정보 당국은 독일의 원자탄 프로그램이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대인 과학자들을 잘 활용하지 못한 탓이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더군다나 미국이 첫 원자폭탄 실험을 두 달 앞둔 1945년 5월 7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 항복했다.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행정부의 전쟁동원국(Office of War Mobilization) 국장, 이어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의 국무장관을 맡은 번스(James F. Byrnes)는 막대한 전시 자원을 들여 생산한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으면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적이 핵을 가진 상황이라면 적을 억제하기 위해 핵이 필요했다고 정당화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핵을 가진 적대국이 없었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에서 사상 첫 핵실험이 이뤄졌다. 오펜하이머 등 과학자들이 개발한 플루토늄 핵폭탄이 폭발에 성공했다. 오펜하이머(밝은색 모자)와 레슬리 그로버스 장군(군 정복)이 그라운드 제로(폭심지)를 살펴보고 있다. 미 육군


그러나 추축국 중 홀로 남은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미군은 과학자들과 이른바 ‘타겟 위원회’를 개최했다. 직경 3마일(약 4.8㎞) 이상의 대도시이면서, 폭발로 인해 효과적으로 손상이 가능하고,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일본 도시를 타겟으로 정했다. 그 결과 지금으로부터 78년 전인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이 각각 투하됐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침공하는 것을 피하고 수십만 혹은 백만 명에 달할 미군의 희생을 막았어야 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또한 당시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통치 아래 있던 한국ㆍ중국ㆍ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한 달에 25만 명에 달하는 속도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다시 비슷한 상황이 와도 같은 결정을 했을 거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을 멈추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핵폭탄을, 그것도 두 차례나 투하했어야 했는가에 대한 회의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1965년에 발간된 미국 역사학자 가르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의 저서 『핵 외교: 히로시마와 포츠담』은 일본 지도자들이 사실 11월로 예정된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 이전에 항복하려 했고, 이 때문에 원자폭탄 사용은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해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그의 주장은 당시 일본과 미국 내 의사결정에 관여했던 여러 민간 및 군 관료의 회고록과 증언들에 의해 뒷받침돼 왔다.

1945년 8월 6일 미국 육군항공대(공군의 전신) B-29가 떨어뜨린 리틀보이(우라늄 핵폭탄)이 폭발 후 버섯구름을 만들고 있다. 미 육군


이들의 공통된 증언은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에 필수불가결했을 정도로 결정적인 군사적 효과를 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관련 근거로서 『핵무기에 대한 다섯가지 신화』의 저자이자 영미안보정보위원회(British American Security Information CouncilㆍBASIC) 선임연구원인 워드 윌슨(Ward Wilson)에 따르면, 히로시마의 피해는 원폭 투하 전, 그해 여름에 수행된 재래식 공격의 피해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45년 여름에 폭격을 받은 68개 도시들을 비교해보면, 히로시마가 민간인 사망자 수 기준으로는 2위, 파괴된 면적 기준으로는 4위, 도시별 파괴 정도 기준으로는 17위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방사능 및 기타 폭발의 여파로 사망한 인원수는 오늘날까지 미국의 죄책감을 더할 뿐, 당시에 고려된 사항은 아니었다.

일본 입장에서 항복을 결정한 것은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였다. 일본 정부는 전쟁에서 지고 있음을 알았고, 다만 항복을 위한 적절한 시기를 찾고 있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뒤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대해 전쟁 선포를 하고 만주와 사할린 섬을 침공하자, 일본은 항복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 정보기관은 미군은 몇 달 동안 일본 본토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반면, 소련군은 불과 10일이면 본토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1945년 9월 2일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 외무상이 미국 해군의 전함인 미주리함에 승선한 뒤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National Archives


한편,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한 결심에도 소련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번스를 비롯하여 당시 주요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사용한 데에는 스탈린에 의존하지 않고 미국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고, 스탈린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협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연합군으로 한편에 있었지만, 추축국이 모두 패배한 뒤 미국의 최대 위협은 바로 소련이 됐다. 미국은 핵무기의 보유를 과시함으로써, 전후 체제에서 소련에 대한 미국의 우위를 확립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은 미국보다 4년 늦게 핵개발에 성공했다. 이로써 세계는 핵 균형을 바탕으로 한 수십 년의 냉전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1968년, 유엔 회원국들은 핵무기가 무분별하게 제조되거나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핵확산방지조약에 합의했다. 이 조약에 따라 비확산을 장려하고자, 미국은 30개가 넘는 국가에 자국의 핵무기를 바탕으로 한 확장억제를 제공하고 있다. 오펜하이머가 살았던 시대는 일본의 항복으로 독립을 얻었고, 미국과 동맹을 맺어 비확산과 확장억제의 길을 택하고 있으며, 여전히 독자 핵무장의 염원을 한 켠에 남겨둔 한국이 꼭 다시 들여다볼만하다.

전경주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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