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분노사회의 끝
카페에 노트북이며 휴대폰이며 가방을 놓고 자리를 비워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는 안전한 나라였다. 외국인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치안 하나는 확실하다는 것도 옛 얘기가 되는 걸까. 불과 며칠 새 백주대낮 도심 한복판에서 끔찍한 ‘묻지마 흉기 난동’이 두 차례 벌어졌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시민들이 무고한 생명을 잃었다. 해외뉴스에서나 보던 ‘외로운 늑대’들에 의한 무차별 테러다. 삶과 죽음을 가른 건 운 좋게 그때 거기에 없었다는 것뿐이다.
인터넷에는 살인예고 글이 쏟아진다. 보름 남짓 315건이 올라와 119명이 검거, 12명이 구속됐다. 검거된 사람의 52%가 미성년자였다. “장난이었다”는 해명이 많지만 ‘여성 20명 살해 예고’를 한 20대 남성은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5개월간 살해 협박 등 여성 혐오 글을 1700개 올리고 흉기를 구입해 검찰은 여성혐오범죄라고 못 박았다. 프로게이머 페이커, 기획사 하이브·SM도 협박받았다. 유행처럼 번져 진위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사회 곳곳에 쌓인 공격성과 분노가 일촉즉발이라는 건 분명하다. 분노가 만연하고, 집단화한 분노가 갈등과 범죄로 이어지는 ‘분노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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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기난동, 흉포해지는 분노범죄
처벌강화에 구조적 해법도 함께
정신건강 사회안전망 마련해야
」
신림역 살인사건 피의자 조선(33)과 서현역 살인사건 피의자 최원종(22)은 둘 다 ‘고립된 외톨이’였다. 사회적 접촉이 없는 가운데 개인적 좌절과 사회적 불만을 불특정 다수에게 폭발시켰다.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조선은 또래 남성들을 마치 슈팅게임하듯 공격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으로 경찰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는 최원종은 조현병 치료를 스스로 중단해 상황이 악화됐다. 악랄한 범죄자일 뿐인 가해자들에게 서사를 만들어주지 말라는 목소리도 있지만(통상 이런 범죄자들은 자신이 미디어에 어떻게 묘사되는지 궁금해 한다), 그와 별개로 범행 동기를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
정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공중협박죄나 가석방 없는 종신형 신설, 사법입원제 도입 등을 검토 중이다. 특히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강제입원을 지금처럼 보호자가 아니라 사법기관이 결정하게 하는 ‘사법입원제’는 그간 도입 논의가 많았으나 현실적 인프라 부족과 환자 인권 문제 등으로 제동이 걸렸었다. 그러나 중증 정신질환자의 경우는 치료가 곧 인권이며, 이들의 치료·관리를 그저 가족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공공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선진국 중 보호의무자에 의한 (강제)입원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는 없다.
물론 사후 처벌 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본질은 분노범죄의 사회구조적 배경일 것이다. 과도한 경쟁과 좌절, 불평등과 양극화, 실업 등 경제난, 상대적 열패감을 안기는 SNS, 혐오를 무한증식시키는 인터넷 문화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분노의 심리적 메커니즘도 중요하다. 2000년 호주 연구팀에 의하면 분노 촉발 상황 1위는 ‘부당하게 대우받는 경우’(44%)였다(『인간의 모든 감정』). 불공정하다거나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이 가장 강력한 분노 감정이 된다는 얘기다. 지난 2월 20대 여성을 유인 살해한 정유정의 범행 동기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는 것이었다.
한창 논란인 진상 학부모들의 갑질도 알고 보면 ‘내 자식의 손해를 참을 수 없다’는 분노에서 출발한 것이다. 고립된 외톨이 범죄이든,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이든, 분노조절장애급 진상 고객의 갑질이든 그 뿌리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사회구조적 근원을 찾고, 동시에 왜곡된 분노 감정을 관리하는 심리적 케어라는 투 트랙 대책이 필요하다. 세계 최고 자살률에서 보듯 나를 향한 분노 표출이 이제는 무차별 살상으로 옮겨가고 있다. 인터넷의 분노가 거리로 나오고 있다.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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