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진보라는 패러독스
기록을 깨는 무더위와 예상치 못한 폭우가 이어진 올여름이다. 한반도뿐 아니라 슬로베니아 등 중부 유럽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인류의 가장 큰 숙제인 기후 변화 대처 방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폭염과 산불 등 지구의 종말 같은 재앙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후손인 우리는 미래를 향한 전진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의 삶이 계속 진보(progress)한다는 생각은 19세기 들어서야 형성된 개념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각종 재해가 줄을 잇는 오늘날, 인류가 과연 끊임없이 발전해서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호메로스와 더불어 그리스 서사시의 양대 전통을 이루는 헤시오도스(사진)는 『일과 날』에서 인류의 시대를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티탄들(거인족)이 지배하던 태평스러운 황금의 시대에서 시작해 올림포스 신들이 지배했던 은의 시대를 거치고, 무섭고 사나운 종족이 전쟁을 일삼고 죽음의 테마가 특징적인 청동의 시대에 다다른다. 네 번째 영웅의 시대는 트로이 전쟁의 배경이 되는,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같은 그리스 신화 영웅들이 거닐던 시대다. 그리고 마지막 철의 시대는 전쟁·질병과 번뇌가 가득한 현재로, 헤시오도스 자신이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한탄하며 작품을 끝맺는다.
영웅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인간세계가 점차 타락해 가는 이미지를 그린 헤시오도스의 역사관은 그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류 역사가 퇴화하는 관념을 지지했고, 주기적으로 재앙과 질병 또는 홍수로 인구가 숙청되었다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무서운 속도로 발달하는 고도의 기술과 과학만을 바라보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 결과로 타격받고 있는 인류의 웰빙과 참된 행복은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닐까.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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