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법으로만 사는 세상의 풍경들
“막연히 고소하게 되면 중재가 이뤄지고 해결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특수교사 고소 논란에 휩싸인 웹툰 작가 주호민씨의 입장문 중 일부다. 아들 책가방 속에 녹음기를 넣어 특수교사 말을 녹음하고, 교사와 직접 대화 없이 수사기관으로 직행한 그에 대한 비난이 거세다. 그런데 꼭 주호민씨만의 문제일까. 모든 것을 법과 수사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이미 깊숙이 뿌리내렸다. 경찰청에 연평균 40만건 이상의 고소·고발장이 접수되는 사회에서 그에 대한 비난은 역설적이다.
주씨의 모습은 ‘법으로만 사는 사회’의 한 단면이란 생각을 들게 한다. 검찰과 법원에서 명명백백히 유·무죄를 가려주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하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법을 먼저 찾고 있다. 전직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가 포토라인에 서고, 구속되던 모습을 언론이 생중계하던 때가 출발점 아니었을까. 법은 삶의 도구이자 무기가 됐다.
사과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것 역시 법으로만 사는 사회의 울적한 광경이다.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수사와 소송에서 불리해질 것이란 불안감은 보편적 감정이 됐다.
일상을 넘어 정치 영역에서도 법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법적 판단을 따르겠다”라는 말은 정치인이 사퇴를 거부할 때 쓰는 관용구가 됐다. 이는 역설적으로 “불법만 아니라면 그 외의 모든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해 159명이 사망한 이태원 참사 뒤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라는 대통령의 뜻이 전해졌다. 그 뒤 ‘법적 책임’을 묻는 수사 절차가 시작됐고, 용산구청장과 전 용산경찰서장을 구속기소하는 선에서 윗선 수사가 마무리됐다. 엄중히 법적 책임을 물었다는데, 유가족은 아직도 정의를 요구하며 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14명의 목숨을 앗아간 오송지하차도 참사에 대한 정부 감찰 결과로 36명이 수사 의뢰됐다. 실무진에게 엄격히 법적 책임을 물었지만, 이번에도 윗선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결재 전결권자까지 꼼꼼히 따진 결과라고 하는데, 질책만 있을 뿐 제대된 사과는 들어보지 못한듯하다. 이러면서 수해가 터질 때마다 ‘대한민국 원팀’을 요구할 수 있을까. 법은 어떤 관료적 칸막이보다 책임과 역할을 명확히 나눈다.
‘법으로만 사는 사회’는 정말 공정하고 정의로울까. 법을 어길까 두려움에 떠는 일상에서 연대를 기대하긴 어렵다. 법은 가장 손쉬운 해결책일 수 있지만, 의존할수록 갈등을 해결할 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법은 도덕과 정의, 공정의 최소한일 뿐이다. 사과도 고개도 숙이지 않는 높은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법으로만 문제를 해결하고, 법을 어기지 않는 것에만 골몰하며, 법의 빈틈만을 찾는 세상 풍경이다.
박태인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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