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 방식 재건축 득실 따져보기···빠른 추진·자금 조달 vs 높은 수수료 부담
신탁 방식이란 전문성을 갖춘 신탁사가 조합 대신 사업 시행을 맡아 사업 전반을 관리하고 일을 추진하는 것을 말한다. 대신 조합은 신탁사에 수수료를 낸다. 조합보다 투명한 관리가 가능하다는 점, 조합과 시공사 혹은 조합 내분에 따른 공사 지연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구체적으로 민간이 추진하는 재건축 사업은 크게 조합 방식과 명의신탁에 따른 신탁 방식 등 두 가지로 나뉜다.
조합 방식은 현재 대부분 재건축 단지가 추진하고 있는 방법이다. 주택 소유주로 구성된 조합이 임원진을 꾸리고 시공사 등과 계약하는 방식이다. 조합이 시공사 선정과 각종 인허가, 분양 등 모든 절차를 맡아 진행한다. 즉, 입주민이 모든 사업을 알아서 해야 하는 구조다.
조합 방식 재건축은 별도 수수료 없이 주민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재건축은 사업비만 수조원에 달하는데 소위 ‘동네 주민’으로 구성된 비전문가들이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점도 적잖다. 우선 조합원 간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각종 비리로 조합 집행부가 교체되면서 사업이 기약 없이 지연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사업이 지체되면 조합원 분담금이 늘어 사업성이 떨어진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사업 형태가 바로 신탁 방식이다. 2016년 도입된 신탁 방식은 조합이 일부 수수료를 지불하고 사업 진행 전반에 걸쳐 전문 신탁사가 관리하는 형태다. 신탁사를 시행사로 지정하려면 단지 전체 소유주의 75% 이상 동의와 동별 소유주의 50% 이상 동의를 확보하고 토지 면적의 3분의 1 이상을 신탁해야 한다.
신탁사가 시행을 대신 맡아줄 때 생기는 장점은 많다.
우선 사업 초기 단계부터 안정적인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신탁사가 자체 신용도를 기반으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을 통해 금융 회사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금력이 충분하지 않은 조합 입장에서는 신탁사를 통해 사업비를 조달할 수도 있다.
신탁 재건축의 또 다른 큰 장점은 바로 사업 속도가 빠르다는 점. 신탁사가 시행을 맡으면 일단 조합을 설립하지 않아도 돼 추진위원회 구성에서 조합설립인가까지 소요되는 2~4년가량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각종 비리가 끊이지 않는 조합 방식보다 투명하게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신탁 방식 정비사업은 2016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에 따라 본격 도입됐는데 이때만 해도 보수적인 부동산 시장에서 빛을 못 보다가 이런 장점이 알려지고 여의도, 목동 주요 단지들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됐다. 그 결과 도입 후 약 7년째 접어든 신탁 방식 정비사업은 사업 누적액이 올 연말까지 약 5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에 따르면 신탁 방식으로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사업장은 전국에 40여곳으로 파악됐다.
신탁 재건축, 어디서 하나?
“1~3% 수수료 부담” 이탈 움직임도
신탁 방식 도입이 가장 활발한 곳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일대 재건축 단지들이다. 여의도에서는 ▲한양(KB부동산신탁) ▲공작(KB부동산신탁) ▲광장3~11동(KB부동산신탁) ▲시범(한국자산신탁) ▲수정(한국자산신탁) ▲삼익(한국토지신탁) ▲은하(하나자산신탁) 등 16곳 가운데 7곳이 신탁 방식 재건축을 추진 중이다.
양천구 목동 일대에서도 신탁 방식 도입이 활발하다. 목동 신시가지 재건축 단지들도 잇따라 신탁사와 맞손을 잡고 있다. 목동10단지는 최근 한국토지신탁을, 목동14단지는 KB부동산신탁을 신탁사로 선정했다. 목동9단지도 뒤처진 속도를 만회하기 위해 지난 5월 예비신탁사로 한국자산신탁을 선정했다. 7단지는 신탁 방식 전환을 논의 중이다.
가로주택 정비사업 등 소규모 정비사업에서도 신탁사 진출이 활발하다. 지난 6월 16일에는 코리아신탁이 경기 고양시 세인아파트 소규모 재건축 사업대행자로 지정·고시됐다. 이외에 한국토지신탁도 지난 7월 10일 삼전동 ‘다모아 모아타운’ 통합준비위원회와 신탁 방식 추진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최근에는 강남권에서도 신탁 방식 재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재건축 대어’로 꼽히는 서초구 서초동 ‘삼풍아파트(2390가구, 1989년 준공)’가 강남권에서는 최초로 신탁 방식 사업을 추진할지 업계 관심이 쏠린다.
다만 현재 삼풍아파트에서는 신탁 방식과 조합 방식을 놓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전문적인 신탁사를 통해 신속하게 추진하겠다는 ‘신탁 방식’과 비용을 절감하면서 주민 합의 중심으로 진행하는 ‘조합 방식’에 대해 주민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다.
예컨대 신탁사를 사업시행자·대행자로 지정하면 수수료가 발생한다. 통상 신탁사가 가져가는 수수료(보수)는 총 매출액(일반분양 수입)의 1~3%다. 사업 규모가 큰 서울 재건축 단지는 수수료만 해도 수십~수백억원에 이른다. 이 비용은 결국 주민 분담금에 포함된다.
계획이 바뀌어 신탁 계약을 해지하려 해도 명시된 조항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수탁자, 즉 소유자의 동의를 받는 과정이 까다로워서다. 계약서상 수탁자 전원 동의 또는 토지등소유자 80% 이상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 등을 해제 요건으로 명시해놓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공 사례가 많지 않은 것이 약점이다. 시장에는 신탁 방식으로 재건축을 추진 중인 곳이 많지만 아직 이 방식으로 준공까지 간 사례가 없다. 이런 불안감 때문에 한국토지신탁과 재건축 사업을 추진하던 서초구 ‘방배삼호’는 올 2월 조합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방배7구역과 잠원동 ‘신반포4차’도 이전부터 신탁 방식을 추진했지만 주민 반발 등으로 조합 방식으로 돌아섰다.
한 정비사업 조합 관계자는 “공사비는 오르고 집값이 내리는 시기에는 재건축 조합이 사업을 안전하게 추진하기 위해 신탁사를 찾는다”면서도 “향후 집값이 다시 오르는 등 시장이 안정화되면 언제든 조합 시행 방식으로 돌아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신탁업계 관계자는 “모아서 보면 금액이 크지만 정비사업이 10년 이상도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큰 부담은 아니다”라며 “최근 시공자들의 공사비 증액 요구가 커지는 점을 감안하면 신탁사에 수수료를 내고 공사비를 철저하게 검증하도록 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고 받아쳤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21호 (2023.08.09~2023.08.1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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