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양 할매들을 떠납니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네요 [보그(Vogue) 춘양]

김은아 2023. 8. 1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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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생면부지인 저를 잘 돌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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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기자]

"이렇게 갈 거면서 왜 왔어? 차라리 오지나 말지… 이럴 거면서 왜 왔어?!"

96세 되시는 천생 여인, 연노랑 나비 같은 우리 할머니는 깜짝 놀라 지팡이를 짚고 나오셔서 내 등을 사정없이 계속 치셨다. 그 연약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2020년 6월에 경북 봉화로 이주를 했다. 직장 때문이다. 정확히는 주중 주거지이자 제2 생활권이다.

춘양 할매들과의 동거

그런 내가 작년 7월에 춘양면 소재지로 이사를 했다. 60년도 더 되어 보이는 낡고 허름한 흙집. 자발적 선택은 어렵지만, 그래도 친한 지인의 부모님이 옆집에 사시니 안심이 되어 앞뒤 안 보고 이사를 덥석 했다.

젊은 사람은 절대 살 수 없는 집이라며 어르신들이 모두 찾아와 걱정하고 염려했던 날들이 생각난다. 가족들에게도 적잖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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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년여간 살았던 나의 집 지난 겨울에 찍어둔 사진이다. 창 너머로 집이 훤이 다 들여다보인다. 금붕어처럼. 이 창문이 현관 역할도 했다. 어르신들은 나를 부를때면 이 창문이 부서져라 내리쳤다. 나는 홑창이 부서져버릴까봐 언제나 조바심냈다. 그래서 언제라도 창문치는 소리가 나면 나는 무조건 달렸다.
ⓒ 김은아
어찌 골라도 그렇게 불편하고 낡은 집을 골랐냐는 타박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난장에 뚝 떨어진 집처럼 겨울철에 어떻게 살 거냐며 모두들 난리법석이었다. 사생활조차도 보호되기 어려운 그런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 너머에 사는 어항 속의 금붕어 같았다. 그럼에도 내가 사는 곳이 유리 어항이라는 것조차 망각한 채 삶의 중력에 밀려 그렇게 생활을 해왔던 것 같다.

동서남북 사방이 어르신들의 눈으로 둘러싸여 나의 행동반경은 항상 그들의 눈과 귀, 그리고 입으로 기억되었고 공유되었다. 나쁘지만은 않은 그러나 항상 좋지만도 않은 사람 사는 그리고 사람 냄새나는 일상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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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들과 이별이다

약 1년여간의 어르신들과의 동거를 마치고 난 나의 일상 주거환경으로 돌아왔다. 사생활이 보호되고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했다. 여전히 봉화다. 이사 날을 잡고 앞뒤 옆집 할매들에겐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차분하게 나만의 정리시간을 갖고 싶었다. 일종의 나를 위한 마지막 정리이자 위로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내 가족들에게까지도 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사 당일이 되었다.
 
▲ 이사하던 날 드디어 이사를 나가는 날이다. 하늘도 푸르고 바람이 많이 불어 시원했다. 날이 좋은데 마음은 참 아팠다
ⓒ 김은아
나랑 같은 마당을 공유하고 사시는 우리 96세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골골이 깊이 패인 눈가에 얼굴에 쪼글쪼글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할머니의 북받친 울음에 마음이 무너졌다.

"자주 올게요…."
"가면 언제 오나? 난 손녀 같아서 참 좋았는데…. 이리 갈 거면서 차라리 오지나 말지. 왜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해?"

울면서도 할머니는 나에게 달큰한 봉지 커피를 타주셨다. 못 보던 분홍색 컵과 네이비색 잔 중에 택하라며 눈물을 훔치신다. 여름이 되니 집안에 습이 차서 쾌쾌한 곰팡내가 스멀스멀 묻어난다. 여름이 다 갔지만, 추석이 오기까지 더운 날들을 잠 못 이루며 앉았다 일어났다 할 그녀를 생각하니 진실로 마음이 무겁다. 어이하나.
 
▲ 96세 할머니와의 마지막 커피 한잔 날 원망하며 눈물흘리면서도 할머니는 정을 담아 뜨거운 커피 한 잔을 타 주셨다. '사랑해요, 할머니!' 더 잘 해 드려야하는데 사는게 참 바쁘고 버거울때가 많이 더 챙겨드리지를 못 했어요.'
ⓒ 김은아
 
이삿짐 차들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니 어르신들이 모여들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그렇게 말없이 가나. 어이 그렇게 가냐. 정들었는데 이렇게 가냐……."

맥이 빠진 듯 정이할매는 몇 번이고 되뇌어 말씀하셨다. 나의 춘양 엄마가 되어준 용이할매는 주방 창문을 열고 말씀하신다. 그녀의 작은 창을 통해 우리는 안부를 물어왔다.

"니 많이 힘들었재? 돈 많이 들여 고쳐놓고 왜 가나?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하더니만 왜 가는데?"

96세 할머니와의 추억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지난 1년여 시간 동안 나의 할머니들은 <보그 춘양>의 주인공이었고 나의 가족들이었다. 잠금장치 하나 없어 문을 걸고 잠글 수조차 없는 집에 간신히 얼기설기 잠금장치를 달았고, 밤이면 천장에서 신나게 파티를 하는 쥐 가족 일당 때문에 긴장하고 잠을 이룬 날이 쇠털같이 많다. 혹여나 파티가 거해져서 천장을 뚫고 방바닥으로 쏟아 내리지는 않을지… 자다가 몇 번을 깨서 파티에 초를 치며 천장을 두드리다 잠이 든 날들.

비가 오는 날이면 지붕을 또박또박 두드리는 소리에 낭만을 느꼈다가도 거세어지면 지붕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때론 두려웠던 순간들. 며칠이라도 집을 비우면 보일러가 얼어 터지고, 보일러가 말짱하면 상수도 배관이 얼어 터져 물을 쓸 수조차도 없었던 불편했던 시간들.

고장 난 보일러 덕분에 영하 20도가 넘어가는 혹한에도 몸서리치며 찬물로 씻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언 몸을 녹였던 시간들, 발이 시려 자다가 양말을 껴 신고 잠들었던 긴 겨울밤들. 그러면서도 달콤 쌉싸름한 음악을 들으며 발을 꼼지락거리며 보냈던 지난 시간들.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난방비가 아까워 보일러를 수시로 껐다 켜시는 우리 96세 할머니. 그것도 부족해 보일러실에 들어가 나도 모르는 배관까지 꽁꽁 걸어 잠그고선 보일러가 안 된다고울먹이셨던 할머니. 명절이면 찾아오는 이 없어 내 마음을 붙잡아놓았던 우리 할머니. 날이 그렇게 추운데도 고무줄이 늘어날 대로 다 늘어진 수면 잠옷을 꿰매어 입으시는 할머니. 1년의 세월이 그리도 농밀한 기억으로 나를 짓누를 줄은 몰랐다. 그런 내가 떠난다니 우리 할머니 억장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니 같은 딸 하나 있으면 좋겠다. 니 가는데 밥 한상도 못 차려주고 어쩌노. 맛있는 것도 못 해 먹이고 어쩌노."
"어머니, 제가 처음 이사 들어온 날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해요"
"내가 뭘 해줬는데?"

용이 할매는 기억을 못 하신다. 그녀가 얼마나 따뜻하고 뭉클한 밥상을 내밀었는지 말이다. 그녀와 나는 생면부지의 사이다. 이사하던 날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녀는 지쳐 쓰러져 있던 나를 보고 안타까워 수차례 불러 그녀의 집으로 데려갔다.

"엄마라고 불르래이. 집에 엄마가 이 모습 보면 얼마나 마음아프겠노. 밥도 못 먹고. 어려워하지 말고 먹으래이. 그냥 우리 먹는 거에 먹으래이."

그녀의 사위가 바다에서 잡아 온 한치를 회쳐서 한 접시 내어주고, 토끼풀 나물에 고사리 생선조림에 상다리 부러지도록 음식을 내주었다. 맛도 좋았지만 처음 본 나에게 정을 베풀어 준 그녀의 마음에 나는 사실 가슴 뭉클했었다. 그날을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아마도 그녀의 삶이 늘 그렇게 베푸는 삶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 

언제든 갈 곳이 생겼다
 
▲ 그녀의 창가 담벼락 위로 작은 창 하나가 있다. 용이 할매와 내가 소통하는 창이다. 그녀는 창문을 통해 나의 안부를 확인했고, 나는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과 그녀의 호탕한 웃음을 통해 그녀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 김은아
 
"잘 살아래이. 마음 고생많았재? 다 잊고 재미나게 살아래이. 이래 가서 내 마음이 아프데이. 오다가다 밥 한 숟갈 달라고 하고 들어오래이. 언제든지 니 오면 내가 밥 주꼬마."

우리 엄마만 같다. 친인척 하나 없는 낯선 이 지역에 언제든지 찾아갈 곳이 생겼다. 지난 1년간 고생은 했지만 보람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서 말이다. 삶의 무대에서 그녀들과의 사연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져 나는 인생의 한 페이지를 아련하고도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었다.

이런 것을 보고 인생은 아름답고 살아볼 만한 가치와 기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써도 달고, 달아도 달다. 그것이 인생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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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써도 달고, 달면 더 달콤한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관심에 행복했습니다. 딱붙어 살진 못해도 또 다른 관점에서 더 나누며 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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