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밭에 출몰한 귀인의 정체, 알수록 모르겠다
가족이지만 아주 다른 사람들, 농사 짓는 부모님 vs. 마케터 딸이 함께 농사일 하는 이야기. <기자말>
[최새롬 기자]
▲ 양파밭을 탐색하는 고양이 |
ⓒ 최새롬 |
대망의 양파를 수확하던 날. 점심을 먹고(11시~3시) 한잠 자고 일어나니 손님이 와 계셨다. 나를 잘 아시는 듯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어렸을 적 본 적이 있다는데, 나는 한참만에 뵈어 낯선 분이다. 그런데 오후 일을 하려고 나가려니 손님이신 아주머니께서 자연스럽게 밭에 서서는 물으시는 게 아닌가.
"양파, 어디부터 담나유?"
남지 않는 농사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약속이나 기미도 없이, 기력을 다 써야 하는 이 험난한 일에 스스로 참여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돈을 받는다고 해도 이 일은 너무나 고되다.
대가 없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혈연으로 맺어져 있어야만 가능할 것 같다. 그것도 1년에 겨우 몇 번만 말이다. 이건 양파대를 쫓아다니는 양파 우선주의 노동만큼 이상하고, 1kg에 750원이라는 가격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귀인이 나타난다'는 옛말은 거짓이 아니었구나. 어려울 때 귀인을 만난다더니 지금 우리가 딱 그 모습이었다. 귀인은 뜨거운 양파밭에 도착해 민첩하게 양파를 담으셨다. 땡볕에 일하는 어려움을 표하지도 않으신다. 기뻐서 마스크 안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힘든 것도 잊은 채 밭을 기고 있는 나는, 순간 머릿 속이 복잡해진다.
'왜 오셨을까?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정말로 이상하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은 이 방문을 자연스럽게(?) 대하는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그를 애타게 기다리지도, 오기를 미리 부탁한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오늘 도착할 줄 알았다는 듯한 모습이셨다. 너무 고마워하거나 또 너무 미안해하지 않고 일이 계속되었다. 나는 이런 신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했다.
▲ 양파와 새참 |
ⓒ 최새롬 |
품앗이, 농사일을 돌아가며 돕는 일. 나는 이것이 점점 사라져가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품앗이도 노동력이 성성해야 할 수 있다. 일단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농촌에는 사람이 없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두 분이 겨우겨우 하는 농사에서 당장 우리 밭과 논을 제치고 다른 집 일을 할 '기력'이 없다.
다른 집도 비슷한 건 마찬가지다. 품앗이가 가능할 수 있었다면 당장 칠십 살이 훌쩍 넘으신 우리 건넛집이, 이제 수확만 하면 되는 감자밭을 포기하고 그걸 밭떼기로 넘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후 참시간을 틈타 어머니에게 귀인의 정체에 대해서 여쭈었다. 알고보니 '귀인'과는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살았고, 부모님과 서로 굵직 굵직한 집안일을 공유할 만큼 가깝게 지내왔다고. 농사를 업으로 하지는 않지만 오며 가며 일을 도왔다 한다. 내가 귀인의 등장에 재차 감격해할 무렵, 부모님은 각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뭐가 그렇게 이상하냐. 생각해 봐라. 우리도 (종종 가서) 잘 혀. 그러니 오셔서 도와주시기도 하시는 거지."
"그렇다고 해도…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우리도 이렇게 힘든 걸. 감사해서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돈으로 할 수도 없다. 정말 어려워."
귀인이 난데없이 도착해 양파를 담으신 것처럼, 어머니도 난데없이 그에게 가 귀인이 된 적도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눈앞 귀인의 정체에 대해서만 궁금해했다. 미스터리이고 풀 수 없는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다.
내 입장에서야 우연히 마주한 분이었지만, 귀인은 어디서 갑자기 떨어진 복은 아니었다. 오늘 그가 양파밭에 도착한 이유는 과거에 도움을 주러 가신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작은 동네라 어머니의 몸살은 소문이 다 났다. 몇 분이 벌써 집에 오셔서 "황소 같은 사람이 몸살이 다 난다"라고 안타까워하셨다(참고로 어머니는 황소는커녕 송아지에도 어울리지 않는 작은 체구다, 그런데도 황소에 비유되고 있어 놀랐다). 어머니가 아프시니 그 집에 일할 사람이 없겠단 생각이 절로 든다. 도와달라는 말은 따로 없었지만 어려움이 예상되는 바, 그게 바로 요청한 적 없는 요청의 정체였던 것.
▲ 양파밭과 고양이 |
ⓒ 최새롬 |
그래서 우리는 아랫밭 윗밭의 양파를 다 털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양파 담은 컨테이너 박스를 트랙터로 트럭에 옮겨 싣고 유통센터에 날랐다. 주말 내 수확한 양파는 총 4.8톤, 가격은 총 350만 원 정도였다(양파는 통상 1년에 한번 수확한다).
선별을 아주 잘했다며 칭찬했다는 구매자의 이야기를 자랑처럼 전해주셨지만, 크게 기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수매한 내용과 금액에 담긴 종이를 보여주었다. 이런 종이는 왜 늘 구깃구깃하게 접혀있다가 펴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풀이 죽어서 이야기했다.
"근데 아버지, 이렇게라면 남는 게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호쾌하게 웃으시며 크게 말씀하신다.
"그러냐, 다음 해는 600만 원(어치) 할 거여. 핫핫."
올해 양파도 좋았다. 아마 최선의 수확이었을 텐데 다음 해에 갑자기 1.5배 가까이 되는 수익을 낼 수 있을리가, 없다. 나는 아버지의 목표가 이천만 원이나 천만 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마른 웃음을 짓고 만다. 허풍이나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현실적인 목표인 것이다.
게다가 600만 원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게 대단한 수익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나마 나오던 마른 웃음도 멈춘다. 남들은 어려운 목표를 포부 있게 말하고 곧잘 이루기도 하던데, 아버지가 크게 말씀하신 소박한 목표는 아무래도 달성하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쉽게 비관을 이야기 하려다가 말았다.
나는 귀인의 정체를 풀어보려고 했다가, 귀인이 되어본 일이 없으므로 귀인의 도착을 설명할 수 없는 서울 촌놈이었다가, 귀인보다도 부모님과 먼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았다. 눈 앞의 양파를 실제로 담으면서도 '마진이니 수량이니'를 따지고 수익에 미리 실망한, 이름만 좋은 마케터였다.
▲ 어머니가 일 잘했다고 주신 방울토마토 선물 |
ⓒ 최새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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