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하늘 보세요!", 그때부터 저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상욱 기자]
하 수상한 시절입니다. 서울 서초 S초 교사 사망 이후, 우리 사회는 겨우 '교육할 권리'를 높이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린 걸까요?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던 교사들의 외침을 국가가 무시하는 동안 둑은 이미 무너져 버린 것 같습니다.
8월 초 대전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졸업한 학생이 교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고, 2021년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는 6개월 사이 20대 교사 2명의 사망을 '단순 추락사'로 보고했습니다. 최근엔 교육부 직원이 자녀의 담임교사와 교육청에 보냈다는 지시성 편지도 회자됩니다. 이 직원이 사용한 어미들(않습니다 / 않게 합니다)로 추측하건데 전생에 교관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훈훈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전히 학교 현장에는 따뜻하고 정겨운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 자주색 비행기 체육대회 날 발견한 자주색 비행기 |
ⓒ 이상욱 |
얼마 전 체육대회 날이었습니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우연히 지후(가명, 중1, 만12세, 남자)를 만났습니다. "선생님, 저기 하늘 좀 보세요." "응?"('뜬금없이 웬 하늘?') 작은 비행기 한 대가 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자주색 비행기였습니다. "어! 비행기가 자주색이네? 자주색 비행기는 처음보는데, 넌 우연히 발견한 거니?" "아뇨, 이때쯤 지나가요."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생기를 띤 지후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운항을 개시한 H항공사의 비행기라고 합니다. 오직 4대의 비행기만을 보유한 이 항공사는 각각 노란색, 파란색, 연두색, 자주색이 있는데 조금 전 제가 본 자주색 기체는, 그러니까 한국에 단 한 때뿐인 비행기였던 것입니다. 더 큰 특징은 국내선 일반석 중 좌석 간 거리가 가장 넓다는 것인데, 소형항공사업자의 법적 제한인 50석을 맞추기 위해 70여 석의 자리를 뜯어낸 후 개조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항공사의 역사는 물론 운항 노선부터 크고 작은 사건 사고도 모두 꿰고 있었습니다. 마치 위키백과를 통째로 외운 것만 같았죠. "넌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있니?" "저 철덕(철도 덕후)이에요!"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학생들 중 덕후들을 발견하곤 하는데, 저는 이런 학생들에게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누구의 강요도 없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것에 온 마음을 빼앗긴 아이들은 순수합니다. 그래서 '덕후가 세상을 구한다'는 말도 좋아합니다. 밀덕(밀리터리 덕후), 코덕(코딩 덕후), 뮤덕(뮤지컬 덕후) 등 수많은 덕후 중 지후는 교통 덕후, 그 중에서도 철도를 제일 사랑하는 철덕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금세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지후는 담임 반 학생도 아니었고, 수업 시간에 만나는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복도를 지나가다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였습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담임선생님께 지후에 대해 물었습니다.
"진짜 신기한 아이야. 주말마다 기차타고 여행을 다니는데, 글쎄 지난주에는 당일 부산여행으로 돼지국밥 먹고 왔대."
"네?"
"근데 더 기똥찬 건 뭔지 알아? 매번 혼자 여행한다는 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용돈 모아서."
"네???"
저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물론 걱정도 됐지만, 안전하게만 다닌다면 힘껏 응원해주고 싶었습니다.
▲ 강의실과 학생. |
ⓒ unsplash |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현실 중 하나는 불행한 청소년일 것입니다. '한국의 사회 동향 2022(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동·청소년의 '삶의 만족도'는 6.6점으로 OECD 27개국 중 가장 낮습니다. 원인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현장에서 느낀 학생들의 불행의 요인은 성공에 대한 획일화된 기준이었습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국의 교육은 대학이라는 종착지를 향한 마라톤 코스와 같습니다. 남들보다 결승점에 빨리 들어오는 것을 행복이라 믿고 가르치죠.
하지만 덕후들은 다릅니다. 규격화된 성공의 잣대를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미래의 보장되지 않는 만족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왜 코스에서 벗어나느냐고 물으면, 왜 코스로만 달리느냐고 되묻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고 열정을 쏟습니다.
저의 마음이 전달됐을까요. 지후는 아침마다 제가 진행하는 요가 수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동작은 많이 서툴지만 수업 준비와 정리를 열심히 돕지요. 저는 간간히 항공권 구입 요령을 전수 받으며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항공사 마일리지를 적립할 수 있다는 카드도 하나 만들 예정입니다. 지난 6월 30일 서해선(대곡-소사 구간) 개통식에 참석한 지후는 철도특성화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DDP에서 열린 진로직업박람회도 다녀왔다고 자랑했습니다.
축하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곧 지후의 생일입니다. 14년 인생 중 가장 중요한 생일이죠. 국내선 항공기 탑승 기준인 만 13세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기차뿐만 아니라 비행기도 혼자 탈 수 있게 됐습니다. 지후는 생일 다음날 가장 이른 제주행 비행기 표를 구입하기 위해 3개월 동안 용돈을 모았습니다. 아직은 혼자 숙박 가능한 나이가 되지 않아 당일치기 제주도 여행이 되겠지만, 지후가 이번 여행으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꿈꾸길 기대합니다. 무엇보다도 행복하길 바랍니다.
악성민원과 교사 인격모독... 그것은 필요악이었을까요
학생이 행복할 때 교사는 희열을 느낍니다. 행복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과 비슷할 것입니다. 자녀의 행복이 부모의 행복을 빼앗지 않듯이, 학생의 행복과 교사의 행복 역시 상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교사가 받아야 했던 수많은 악성 민원과 견뎌내야만 했던 인격 모독들이 학생들의 행복을 위한 필요악이었는지를요. 학생 인권과 교권을 대립시키는 치킨게임이 지금 이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를요.
사실 저는 학생들 생일을 공평하게(?) 모두 챙기지 않는 담임이지만, 어제는 지후가 비행기에서 먹을 간식과 여행하면서 읽을 만한 청소년 소설을 준비했습니다. 이 선물들을 전달하고 싶어서 방학 중이지만 잠깐 보자고 약속 했는데, 지후가 나오겠지요?
▲ 연두색 비행기 생일날 발견한 연두색 비행기 |
ⓒ 이상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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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번 기사는 교육계의 슬픈 소식만 전달되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썼습니다. 다음 기사엔 원래 계획했던 학교 폭력 사안 발생시 교사가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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