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의사 옥중 사형에 "가엽구나!"…日시인이 쓴 일제 잔혹함

김윤호 2023. 8. 1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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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부친인 박시규 옹이 쓴 '구명청원'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의 조사서. 이 조사서엔 1920년 7월 9일자로 일본 내무대신, 외무대신, 문부대신, 내각총리대신, 법제국장관 등의 직인 등이 담겨 있다. [사진 박상진 의사 증손 박중훈씨]

1921년 일본 여류시인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인 다카무레 이쓰에(高群逸枝, 1894~1964)는 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 의사(1884~1921)의 옥중 사형 소식을 접하자 일제의 식민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곤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오수시의 제국의 도읍(午睡時の帝都)」

이란 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일본서 찾은 여러 건의 미공개 자료


‘(전략) 그 밑바닥에는 개미지옥이 우글거리고 있다. 어두운 감옥, 창백한 창. 시모노세키행 3등 열차. 오수시의 바퀴의 굉음. (중략) 노(老) 조선인. 그의 사랑하는 아들은 박상진, 독립광복단장. 가엽구나! (중략) 하늘은 학정(虐政)의 안개에 덮이고, 피는 하수구 속에 진창이 되어 있다. (후략)’

시구엔 항일 독립투사들이 살인·강도·방화 등 엉뚱한 죄명을 뒤집어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안타까움과 일제의 잔혹함이 잘 드러나 있다.

일부. [자료 박상진 의사 증손 박중훈씨]" src="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308/13/486c50b0-c9eb-4833-81f8-139d090f79ce.jpg">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가 2년간 발품

「오수시의 제국의 도읍」

을 포함해 울산 출신 박상진 의사와 관련한 다양한 미공개 독립운동 자료가 일본에서 여러 건 확인됐다.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가 중심이 돼 최근 2년간 일본 현지에서 발품을 팔아 발굴해낸 것들이다. 자료는 600여쪽 분량이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3월 독립유공자 훈격을 위한 공적 재평가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진행했다. 사진은 박상진 의사. 뉴스1

13일 박 의사 증손인 박중훈(68)씨 등에 따르면 이번에 일본서 찾은 독립운동 관련 자료 가운데 대표적인 건 크게 4가지다. 우선
「오수 시의 제국의 도읍」

원본이다. 이 시는 국내에선 2011년 이영희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의 논문『일제 강점기 일본 근대시 속의 조선묘사』를 통해 처음 소개됐지만, 추모사업회가 완전한 시 원본을 확보한 것이다.


몰래 건넨 필기구, 애끊는 부정


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박상진 의사 동생인 박하진 옹의 판결문도 있다. 박하진 옹은 일본인 간수를 포섭, 수감 중인 형에게 ‘필기구’를 전달했다. 박상진 의사는 이 필기구를 통해 수감된 독립운동 동지들과 계속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박하진 옹은 필기구 제공사실이 들통나 체포된 뒤 1918년 9월 1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박상진 의사의 부친인 박시규 옹의 아들 구명운동 관련 자료도 빼놓을 수 없다. 아들의 생명을 어떻게든 구해 보려는 애타는 부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명청원에 대한 일본 정부 조사서, 일본 사령관 우쓰노미야타로(宇都宮太郎)에게 보낸 탄원서 등이다.

이밖에 1920년 2월 19일자 박상진 사건 판결 변론서 원본과 국내에선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 1919년 2월 28일자 광복회 공주지방법원 1심 판결문도 주요 자료로 분류된다. 박중훈 씨는 “1921년 8월 13일 자 ‘매일신보’ 기사 속 대구감옥 일본인 소장 인터뷰에 나온 ‘박상진의 사형집행 때문에 각의가 서너 차례나 열렸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추적 끝에 이들 자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당시 조선총독부 측에서 사형 집행을 강행했으나 그 과정에 일본 정계의 반대 입장도 있었다는 내용이 보이는 만큼 다각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박상진 의사 생가에서 증손 박중훈씨가 증조부 업적을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는


박 의사는 1910년대 전국 규모의 항일 비밀결사단인 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인물이다. 광복회는 1915년 7월 15일(음력)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설돼 친일부호 처단, 일제세금 탈취 같은 활동을 벌였다. 조선 총독 암살도 기도했다. 경주 최부잣집 딸과 결혼한 박 의사는 1902년 상경해 국내외 정세를 배웠다. 이후 의병 신돌석, 김좌진 장군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항일 비밀결사단인 신민회에서도 활동했다.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해 평양 지원에 발령받았지만 “독립운동가를 내 손으로 단죄할 수 없다”며 판사직을 버렸다. 전답을 저당 잡혀 빌린 자금으로 곡물상회로 위장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든 일화도 유명하다. 박 의사는 1918년 체포돼 21년 향년 38세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박 의사는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는 서훈 등급으로 따지면 대한민국장(1등급), 대통령장(2등급)에 이은 3등급에 해당한다. 이에 서훈 등급을 올려야 한단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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