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사이렌? 연기 맡고 탈출했다"…하와이 화마 키운 실책 셋
“그날 (마우이) 카운티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집을 희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난 8일(현지시간) 오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주민 마이크 치치노는 지역 당국의 주먹구구식 화재 대응에 분통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차량 눈앞까지 화염이 다가온 상황에서 재난 정보를 얻기 위해 라디오를 켰지만 원하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면서 “카운티가 우리를 죽음의 덫에 빠뜨린 것처럼 느껴졌다”고 떠올렸다.
12일로 화재 발생 닷새째. 여전히 재확산 위험은 있지만 큰 불길이 대략 잡혀가면서 화마가 할퀴고 간 참상이 드러나고 있다. 피해가 집중된 마우이 섬 북서쪽 해안 도시 라하이나는 원자폭탄을 맞은 듯 잿더미로 폐허가 된 모습이다.
이날 저녁까지 파악된 사망자는 93명이라고 CNN이 전했다. 리처드 비센 마우이시장은 “지금까지 나온 희생자들은 건물 밖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구조물 내부 등 잔해 수색을 본격화하면 피해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와이주 당국은 연락이 끊기거나 소재 파악이 안 된 실종자가 약 1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AP 통신은 1918년 미네소타주 북부 칼턴 카운티 등을 덮친 산불로 수백 명이 숨진 이래 100여 년 만에 최악의 산불로 남게 됐다고 보도했다.
현장에는 미 본토에서 파견된 150명의 미 연방재난관리청(FEMA) 요원이 투입된 상황이다. 90명은 수색 구조를 지원하고 있고, 134명 군 병력도 추가로 동원됐다. 최소 약 2207개 건물이 이번 화재로 파괴됐으며, 아직도 라하이나, 풀레후·키헤이, 쿨라 등 3개 지역에서 불길이 잡히지 않고 있다.
화재 면적은 총 2170에이커(약 8.78㎢)로 추산된다. 서울 여의도 면적(약 2.9㎢)의 약 3배가 하루아침에 시커먼 숯 더미가 된 셈이다. 지역 재건에 필요한 비용은 55억2000만 달러(약 7조3500억원)로 추정된다. 최은진 전 마우이 한인회장은 “하와이에서도 지상낙원으로 여겨진 마우이섬이 이렇게 타버려 다들 충격이 크다”며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기후변화도 컸는데 카운티나 주 정부에서 대비를 못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산불 초동 단계 부실 대응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주 당국은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앤 로페즈 하와이주 법무부 장관은 이날 “마우이 섬 산불 전후에 있었던 주요 의사결정과 상시 대비책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를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재 구호 활동에 대해 전면적 지원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제는 규명 과정에 들어갈 때”라고 했다.
경보 사이렌 왜 안 울렸나
먼저 산불 초기 경보 사이렌이 왜 울리지 않았는지를 놓고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하와이주 안전 경보 시스템에는 재난재해 대비 경보용 사이렌이 약 400개 있으며, 마우이 섬에도 80개의 사이렌이 갖춰져 있다. 재해 발생 시 긴급 비상 상황을 공유하기 위한 사이렌이 있었지만, 하와이 재난관리청은 “화재 발생 첫날인 지난 8일 경보 사이렌이 울린 기록이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불길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번지고 언제 어느 지역에 전기가 끊겼는지 등 재난 정보가 신속히 공유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우이 재난관리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이렌 자체가 반드시 대피를 의미하진 않으며 대개 추가 정보를 찾으라는 경고를 위해 사용한다”고 했다. 하지만 AP 통신과 NBC 방송 등에 따르면, 지역 주민들은 “당국은 우리에게 아무런 경고를 하지 않았다. 사이렌도 없었고 알람도 없었다”(리사 파니스), “휴대전화에 사이렌이나 재난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라나 비에라), “사람들이 대피하도록 쓰나미 사이렌을 켤 수도 있었다”(브라이언 사이즈모어) 등 경보 체계가 작동하지 않은 점을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사이렌 소리를 듣지 못한 라하이나 주민들은 화염을 직접 목격하거나 코를 찌르는 연기 냄새를 맡고서야 위험을 인식하게 됐다는 얘기다.
통신·라디오 ‘먹통’도 한몫
산불 이후 정전과 휴대전화 불통 등 통신 먹통 상황도 화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AP는 “라하이나 지역 불길이 퍼져 주택가를 덮치는 상황에서 몇몇 주민들은 때때로 혼란스러운 내용의 소셜미디어(SNS) 게시물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주민들을 위한 대피 안내 보도가 제구실을 못 해 도로 차단 상황을 몰랐던 운전자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좁은 시내 거리로 내몰리게 됐다는 게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이 바람에 도로 일대가 갑자기 병목 현상을 빚으며 도로에 갇힌 차량 내 사망자들이 늘었다고 한다. 도로 바리케이드를 지나쳐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는 주민 네이던 베어드는 “교통체증이 심했고 아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며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저는 ‘왜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불길을 향해 차를 몰지?’라고 생각했다”고 캐나다 방송 CBC에 말했다. 역시 화재 첫날 도로 탈출에 성공한 주민 마이크 치치노는 “오후 3시 30분 불길이 커지는 것을 보고 집으로 갔고 이웃들에게 어서 집을 떠나라고 소리쳤다”며 “이동 중 라디오 방송을 켰지만 필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모든 주민이 라하이나 한쪽 구석에 갇힌 상황이 됐다”고 증언했다.
‘산불 위험’ 경고에도 과소평가
현지에서 이미 산불 위험 경고가 있었지만 지역 당국이 위험을 과소평가한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CNN 방송은 주-카운티 당국의 재난대비계획 문건 분석 결과를 토대로 “지난 5년간 발표된 다수 보고서에는 산불 위험이 증가하고 있으며 허리케인으로 인해 악화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그런데도 지난해 하와이주의 한 보고서는 산불 인명피해 위험 수준을 ‘낮음’으로 평가했고 하와이 재난관리청 홈페이지에는 산불 발생 시 대응 요령조차 안 나왔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2014년 민간기구 ‘하와이 산불 관리 조직’이 당국에 제시한 산불 방지 계획안은 라하이나가 지형과 기후 특성상 마우이에서 화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라고 짚었다”고 전했다. 상대적으로 건조한 기후에 허리케인 강풍까지 더할 경우 대형 화재 위험이 높다는 경고등이 꾸준히 켜졌지만 지역 당국이 산불 대응을 소홀히 했다는 지적이다.
평소 이 지역의 화재 등 비상 상황에 대비한 위험관리 체계가 허술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마우이 섬 비영리단체 ‘업컨트리스트롱’의 클라우디아 가르시아 회장은 “비상시 위험 대비는 분명 형편없었다”며 “비상 상황에서 실제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정 라디오 방송이나 지정 TV 방송국은 없었다. 우리는 그저 페이스북에 접속해야 했다”고 말했다.
한인 인명피해 신고 없지만 재산피해
마우이 카운티가 이날 처음 공개한 산불 피해 조사 내용에 따르면, 라하이나에서 이번 화재에 노출된 가옥은 총 2719채로 이 중 2207채가 전소하거나 파손된 것으로 집계됐다. 라하이나 지역 피해 상황만 해당하는 것으로 섬 내 피해 지역을 모두 포함하면 피해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집을 잃고 대피한 이재민은 4500명으로 집계됐다. 다만 라하이나 주민 1만2702명 중 상당수가 가족이나 친지 등 집에 머무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재민 수가 1만명을 넘을 거라는 현지 언론 보도도 나온다. 주민들은 화재 당시 급히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된 모습에 망연자실한 상태다. 설사 집이 온전하더라도 전력 차단에 물 부족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우이 카운티 수도 당국은 “산불로 파이프 수백 개가 손상된 만큼 수돗물이 오염됐을 수 있으니 추후 통보 때까지 물을 끓인 뒤 마시지도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현지 한인 동포나 관광객의 인명 피해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주호놀룰루 총영사관은 “현재까지 한인 인명 피해 신고는 접수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마우이 한인회 등 현지 동포 커뮤니티에 따르면 한인 피해 규모는 주택 4채, 사업장 12곳, 한인 소유 건물 2~3채 등이다. 마우이 섬 화재 직후 숙소로 들어가지 못한 한국인 일부 관광객들은 현지 한인교회에서 마련된 임시 대피소로 들어갔다가 현재는 모두 대피소를 떠난 상태다.
잿더미서 구조 활동 계속
잿더미로 변한 화재 현장에서 구조요원들은 시신 발굴 등에 여념이 없다. 구조대는 시신 수색이 끝난 주택에는 밝은 오렌지색 ‘X’ 표시를, 유해 발굴 장소에는 HR(Human Remains, 시신 있을 가능성)을 표기하며 구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AP에 따르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은퇴 소방관 제프 보가르는 35년 지기 친구를 화마에 잃은 슬픔을 애써 삼켰다. 보가르와 그의 친구 프랭클린 트레조스는 산불이 나고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다 뒤늦게 현장을 탈출하려 했다. 불길이 점점 더 커지고 가까워지자 더 이상은 위험하다 판단하고 지난 8일 오후 탈출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각자 차량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보가르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갑자기 차량 문 마저도 열리지 않자 그는 창문을 깨고 나와 땅바닥을 기면서 탈출을 이어갔다. 그러다 경찰 순찰차에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안타깝지만 그의 친구 트레조스는 목숨을 잃었다. 보가르가 다음날 집에 돌아와 보니 친구는 그의 차량 뒷좌석에서 잿 속 한 줌의 뼈로 남아 있었다.
생존자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케코아 란스포드는 BBC 방송에 “화마를 피하고자 바닷가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다”며 “바닷가에 시신이 떠다니고 있다”고 참담함을 토로했다.
12일 조쉬 그린 하와이주지사는 "하와이는 물론 미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라며 "우선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구호에 집중해야 한다.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고 살 집과 건강 진단 등을 해 주는 등 피해지역 재건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도로 끊겨 구호품 전달 늦어져
화재 피해로 도로가 끊기는 등 피해가 커지면서 구호품 전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라하이나로 가는 주요 도로는 12일 주민들에게 잠시 개방된 후 바로 다시 폐쇄됐다. 카하쿨로아 도로는 개방돼 있지만, 현지인들은 그 길로 운전하는 게 매우 위험하다고 토로했다. 루스 리는 BBC에 “라하이나로 가는 ‘뒷길’로 알려진 이 도로는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폭이 좁고 급커브에 가파른 내리막길”이라며 “(라하이나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구호품이라도 전달하려 하는데 이 길로는 도저히 지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라하이나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최소한 생존품을 전달할 수 있게끔 거주자에 한해 주요 도로를 개방해 주길 바라고 있다. 화재로 집을 잃은 주민인 리즈 게르만스키는 “정부는 사람들을 돕는 것 마저 방해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정부의 구호 물품 조달이 늦어지자 하와이 원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조직을 구성, 재난 지역으로 물품 수송에 나서고 있다. 배를 이용해 발전기, 프로판 가스, 의류, 즉석식품 등 보급품을 싣고 피해 지역에 인접한 카하나 해변에 실어 나르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김민정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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