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고, 부딪히고, 역주행까지... 손에 땀나는 운전일기

조성하 2023. 8. 1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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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스릴 넘치는 운전 에세이 손화신 지음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나 타고 다닐 걸>

[조성하 기자]

맛있는 음식과 용돈이 전부였던 어린 시절. 명절이면 내 시선을 사로잡은 TV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그건 우습게도 고속도로 정체 상황을 전하는 뉴스였다. 느리게 움직이는 수 천 대의 차들이 차곡차곡 쌓인 회색 화면. 그 앞에 앉아 종일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지, 겨우 들른 휴게소에서는 무엇을 먹을지, 지난한 시간 끝 목적지에 도착하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곤 했다.

우리 집은 차를 유지할 여유와 필요 모두 없었던 것 같다. 때마다 멀리 갈 일 없이 친척들은 같은 도시나 먼 타국에 살았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은 자가용보다 버스나 지하철이 더 가벼운 곳이었다.

쉬는 날이면 아빠는 즉흥적으로 엄마와 나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한적한 곳에 도착해 발 닿는 대로 걸어 다니는 게 우리 가족의 여행이었달까. 덕분에 대중교통만으로도 전국 구석구석을 다녔지만, '차'와 연결된 세상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직장마저 KTX로 오가다 운전자의 삶에 닿은 건 한참 후. 문득 면허가 생기면 한 뼘 더 어른이 될 것 같았다. 필기와 기능, 가슴 떨리는 도로 주행을 거쳐 '법적으로 운전 가능한 사람'이 되자마자 써보지도 못한 어른의 자격증이었지만.

도로 위에서 만난 신세계

그러다 배우자와 하얀색 중고 SUV가 등장했다. 뒤늦게 당도한 낯선 운전의 세계에 들뜬 것도 잠시, 그 곳은 총탄이 날아오는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보이는 건 전부 외제차 뿐인데 꽉 낀 도로에서 어떻게 차선 변경을 하라는 건지. 다 버리고 몸만 빠져나오고 싶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나 탈걸! 운전을 왜 해 가지고!'
 
나는 길 위의 불확실성을 사랑한다. 운전은 나의 본능이자 기쁨이다.(p.35)

세상에, 이런 무시무시한 도로 위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책이 있다. 운전이란 '내가 주체가 되어 하는 주도적 행위'로 그날의 날씨와 음악과 계절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라 정의 내리고, 맵고 짜서 입안이 얼얼하다가도 끝내 달콤한 맛을 건네준다며 즐거워한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나 타고 다닐걸> 책 표지 나같은 운(전)포(기)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니
ⓒ 조성하
 
상처 입은 나와 한마음인 줄 알았던 제목의 책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나 타고 다닐걸>(arte)의 손화신 작가는, 오마이뉴스에서 취재기자로 일하며 8년간 자동차와 함께 지지고 볶으며 겪은 운전하는 마음들에 대해 기록했다.
 
"도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요, 정글이에요, 정글. 정글은 약육강식이잖아요. 조금만 어설프면 잡아먹혀요. 안 봐줍니다." 강사님의 조언은 현실적이어서 살벌했다. 나는 물었다. 그러면 이기적으로 운전해야겠네요. 그런데, 그런 건 또 아니란다. 바르게 운전해야죠.(p.17)

운전은 결국 우리네 인생과 같다며 점잖게 말할 줄 알았다면 안전벨트부터 매길. 첫 장을 넘기자마자 정글로 던져지고, 뻥 뚫린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듯 몰아치는 이야기에 흠뻑 빠질 것이다. 
주차 공간도 없이 덜컥 친구에게 300만 원에 경차 '백호'를 데려온 첫 날 밤, 저자는 살면서 가장 피하고 싶은 서울 주택가의 주차 지옥을 맞닥뜨린다. 내 차 한 대 누일 작은 땅 없어 서러운데, 갓 면허만 쥔 올챙이에게 비좁은 골목길은 그 자체로 공포 영화. 차 빼라고 '호출'했던 차주인에게 운전을 맡기는 비참함을 하늘도 아는지 비까지 내린다.
 
5분쯤 지났을까. 여자가 우산을 쓰고 내려왔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저자세를 유지하며 이 난해한 골목에서 내 차를 좀 빼달라고 애원했다. 여자는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는 이내 내 차에 올라타서 조심스럽게 차를 운전했다. (…) 여자는 한숨을 쉬며 들어가버렸고, 우산도 없이 나온 나는 얼른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밤에 온 동네를 배회했다.(p.90)

일과 함께 달리는 마음
 
▲ 탈진 주차 후 뒷좌석에 드러누워 기절했던 순간
ⓒ 조성하
 
그런데 마무리가 독특하다. 호된 신고식 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주차장이 널널한 마곡의 오피스텔로 즉시 이사 결심을 한다.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도 삶의 질이 올라갈 수 있다며 만족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매일의 고난과 거쳐 운전이 선사하는 메시지가 시종일관 헤드라이트처럼 반짝이는데, 쉼 없이 꾸준히 달리는 마음을 함께 발견할 수 있는 건 매번 다른 장소로 취재를 나가는 저자의 직업 덕분.

단속 카메라의 매서운 눈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소심함을 드러내고, 정비소에서 가까스로 바가지를 모면하며, 긁고, 부딪히고, 심지어 빗 속에서 역주행하는 우당탕탕 운전 일기를 따라가다보면 나의 무모했던 지난 날이 포개져 절로 손에 땀이 배어난다.
 
운전대는 혼자서 잡지만, 도로에 나가면 셀 수 없이 수많은 운전자와 발맞춰 도로 위를 달리지 않나. 우리는 그 질서 위에 올라탐으로써 협업이란 걸 배우고, 이런 협업의 훈련이 쌓여 내면의 성장을 이룬다. (...) 우린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면서 운전이란 걸 한다.(p.55)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듯, 운전으로 벌어진 사건과 나의 거리를 일정하게 두고 지켜봄으로써 어느새 합류하는 차선처럼 절묘하게 삶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거기엔 사람들이 있다. 도로를 일군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사람들.

행복을 나눈 가족, 목숨을 건 우정, 지바겐을 드림카로 꼽을 수밖에 없는 여성 운전자까지 섬세하게 관찰하며 담아낸 문장을 읽다 보면 어느새 운전이 좋아지려 한다. 금속 차체 안 몽글거리는 마음들도 만져진다. 삭막하다고만 여겼던 도로에 연결된 마음들이. 운전 경력과 상관없이 네모난 차 안에 앉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운전과 삶은 정말 꼭 닮아 있었다. 나만 잘한다고 끝이 아닌 것도, 부드럽게 흐름을 타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도. 비상등 세 번 깜빡이며 뒷 차에 고마움을 전할 때의 그 짜릿함을, 이어짐을 더욱 기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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