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는 '바퀴달린 보조 배터리'…V2H 확산
美·日 등 전기차 기업들 V2X 사업 확대
전기차 배터리, 클라우드 전력망 역할
캠핑을 좋아하는 김민석(가명)씨는전기차 구매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캠핑장에서 이웃 캠퍼가 전기차의 V2L(Vehicle to Load) 기능을 이용해 온풍기와 에어컨을 사용하는 걸 볼 때마다 부럽기 그지 없다. 최근엔 전기차에 에어프라이어를 연결해 다양한 캠핑요리를 즐기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전기차가 바퀴달린 에너지저장장치(ESS)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근엔 야외에서뿐 아니라 비상시 가정에까지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V2H(Vehicle to Home) 기능을 탑재한 전기차도 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전력망에 연결하는 V2G(Vehicle to Grid)까지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차가 일종의 클라우드 전력망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미국 GM은 지난 9일(현지시간) 2026년부터 출시하는 얼티엄 플랫폼 기반의 모든 전기차에 V2H 기능을 탑재한다고 발표했다. 얼티엄’은 GM의 전기차 플랫폼을 말하며 국내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이 배터리를 공급한다.
당초 이 회사는 최근 공개한 2024년형 쉐보레 실버라도 EV RST 픽업 트럭에만 V2H 기능을 적용한다고 발표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2024년형 GMC 시에라EV 데날리 에디션1, 2024년형 쉐보레 블레이저 EV, 2024년형 쉐보레 에퀴녹스 EV, 2024년형 캐딜락 리릭, 2024년형 캐딜락 에스컬레이드IQ에도 V2H 기능이 들어갈 예정이다.
GM·테슬라 등 V2H 적용 확산
V2H는 전기차의 배터리를 가정집에 연결해 조명을 키는 가전 기구용으로 사용하는 기능을 말한다. 기존 V2L에서 한단계 앞선 것이다. 전기차를 건물에 연결하면 V2B(Vehicle to Building), 전력망과 연결하면 V2G(Vehicle to Grid)라고 부른다. 이처럼 전기차의 배터리를 외부와 연결해 활용하는 기술을 통틀어 V2X(Vehicle to Everything)라 한다.
V2H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양방향 충전이 가능한 별도의 장치가 필요하다. GM에너지사업부는 지난달 V2H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번들 제품을 출시 한 바 있다. GM에너지사업부는 GM이 지난해 테슬라와 경쟁하기 위해 설립한 사업부로 배터리팩과 태양전지패널, 전기자동차 충전기 등 에너지 관련 제품을 개발, 출시하고 있다.
GM은 전기차가 단순히 이동 수단뿐 아니라 에너지 관리 솔루션으로 기능이 확장될 것으로 보고 이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GM에너지사업부의 웨이드 쉐퍼 부사장은 “V2H를 모든 얼티엄 기반 제품에 통합합으로써 소비자들은 차량 자체를 뛰어넘는 가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테슬라도 지난 3월 열린 인베스터데이(Invester day) 행사에서 2025년부터 V2H 기능 적용 가능성을 내비쳤다. 드류 바글리노 테슬라 부사장은 질의응답 시간에 “테슬라 전기차도 향후 2년내 양방향 충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V2X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양방향 충전 기능이 필요하다.
뒤이어 일론 머스크가 “자동차를 플러그에서 뽑는다면 집이 어두워지고 사람들은 불편해할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양방향 충전을 원할 것 같지는 않다”는 다른 의견을 내비쳤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머스크의 말보다는 바글리노 부사장의 말에 더 주목했다.
경쟁 차종들은 이미 V2L이나 V2H 기능을 탑재했거나 탑재 예정이다. 현대차기아는 E-GMP 플랫폼에서 V2L 기능을 지원한다. 리비안은 향후 V2H와 호환할 수 있는 V2L 기능을 적용했다. 포드 F-150 라이트닝은 지난 3월 출시한 ‘포드차지스테이션프로’와 연결해 V2L, V2H 기능을 지원한다.
일본의 닛산 리프는 지난해 7월 전기차의 잉여 전력을 전력망에 판매할 수 있는 V2G 서비스를 전기차 최초로 선보였다. 닛산 리프는 2013년부터 V2G 기능을 탑재했는데 지난해서야 비로서 이 기능을 실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루시드도 자사 차량에 V2X 기능을 탑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폭스바겐도 전기차에 양방향 충전 기능을 적용할 계획이다.
日은 보조금까지 지급
전기차의 V2H가 가장 빨리 보급되고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의 전기차 보급률은 2021년 기준 0.8%로 유럽(16.7%), 중국(15.9%), 북미(5%)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운수 부문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전기차 관련 설비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그 대상중 하나가 V2H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지난 5월 펴낸 보고서를 보면 일본 정부는 올해 예산 100억엔을 들여 V2H 충방전 설비 및 외부 충전기 도입, 전기차(하이브리드차) 충전 설비 구입비, 수소 스테이션 정비비 및 운영비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니치콘, 파나소닉과 같은 일본 전자 기업들도 V2H 시장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니치콘이 출시한 ‘트라이브리드(TRIBRID)’는 주택용 태양광 발전, 가정용 축전지, 전기차에 내장된 배터리에 에너지를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한 곳에 전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어해주는 시스템이다. 니치콘은 트라이브리드 축전 시스템 주문 건수가 지난해 5000건에 달했으며 올해 두배이상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코트라는 “V2H 대응 전기차종이 증가한 데다 보조금 신청도 쉬워졌다”며 “2023년에는일본 전기차의 대부분이 V2H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파나소닉도 지난 2월 V2H와 축전 시스템을 결합한 ‘에네플랫(eneplat)’을 출시했다. 기존 태양광 발전 시스템, 가정용 축전지를 전기차와 연결해 사용하는 방식이다.
아예 직장에서 충전한 전기를 가정에서 사용하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스미토모 상사는 지난 4월 기업용 전기차 리스 사업과 V2B, V2H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코뷴(Hakobune)’을 설립했다. 직장에 설치한 태양광 발전 시스템의 잉여 전력으로 낮시간에 전기차를 충전하고 그 전력을 집으로 가져가 사용하는 방식이다.
전기차 한대에 10일치 쓸 전기가
해외에서 V2H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비상시에 전기차가 유용한 전력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광 발전 등 신재생에너지와 연동한다면 전기차 배터리가 클라우드 전력망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미국은 2021년 2월 불어닥친 텍사스 한파로 수백만 가구가 정전 사태를 겪은 이후 ESS로서 전기차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전기차에 탑재된 고용량 배터리에는 가정에서 약 10일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의 전기기 들어있다.
현대 아이오닉5에는 77.4킬로와트시(kWh) 용량의 배터리가 들어있다. 올해 1월 기준 서울시 가구당 일평균 전력 사용량이 7.9kWh인 점을 감안하면 단순 계산시 9.7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기가 들어있는 셈이다.
V2H 보급에 장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내에서 V2H 기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양방향 충전 장치가 필요한데 가격이 수백만원에 달한다. 포드가 지난 3월 출시한 홈인터그레이션시스템의 가격은 3895달러(약 513만원)다.
단독주택이 많은 미국과 달리 아파트가 많고 주차 환경이 열악한 한국에서는 V2H의 활용성이 떨어질 수 있다. 이호 한국자동차연구원 산업분석실장은 “해외와 한국의 자동차 사용 환경이 달라 국내에선 V2H의 효용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전력 회사들과 연계해 V2G 기능을 활성화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과 SK렌터카는 전기차를 에너지 저장장치로 활용해 전력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해소에 기여하는 V2G 실증 사업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강희종 기자 mindl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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