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직장은 모르겠고요, 환갑 넘어도 일할래요
이모(29)씨는 한 외국계 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회사에 연봉도, 복지도 좋았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퇴사했다. 입사 2년 만에 내린 결정이다.
이씨의 결정은 특별하거나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다. 지난해 5월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청년 10명 중 7명(65.9%)이 첫 직장에서 퇴사했다. 평균 근속 기간은 약 1년 7개월. 2년이 채 안 된다.
청년들이 일을 하기 싫어서 회사를 일찍 그만두는 건 아니다. 지난 2월 동아일보가 취업플랫폼 캐치와 함께 20~30세대 1000명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청년들이 은퇴하고 싶은 나이는 평균 71.2세였다.
이는 현재 고령층(55~79세) 생각과 비슷하다.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 근무 중인 고령층의 93.0%가 계속 일하기를 희망하고, 이들은 평균 73세까지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현실에서 일찍 그만두는 청년들을 끈기가 없다고 볼 수 있을까. 법적 정년보다 10년 더 일하고 싶거나, 일찍 은퇴하고 싶은 요즘 청년들의 속사정을 들어봤다.
“꿈은 없고요, 그냥 오래 다니고 싶습니다”
서울 중랑구 한 은행에서 일하는 이모(29)씨에겐 “큰 야망 없이 잔잔하게 사는 것”이 삶의 신조다. 연금을 많이 받고 싶어 이직을 계획하는 동시에, 퇴근 후 외국어 자격증 공부와 대학원 준비를 병행하고 있다. 정년퇴직 이후 전공을 살려 학원을 차리기 위해서다. 이씨는 “연금만으로 노후 생활이 가능한 프랑스와 달리, 한국에선 국민연금만으론 숨만 쉬어야 하는 수준”이라며 “정년까지 회사에 다니며 노후를 준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노후를 충분히 준비하기엔 법적 정년이 짧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청년들도 이미 연금소득만으로 생계 유지가 어렵다는 걸 안다. ‘2023년 5월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연금을 수령한 고령층의 월평균 수령액은 75만원에 그쳤다.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청년 1인 가구 월평균 생활비인 161만원과 올해 최저임금 월 환산액인 191만원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무역회사에서 6년째 근무 중인 신모(30)씨는 “요즘 물가와 집값을 생각하면 정년까지 일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나이까지 일하겠다”고 말했다. 정년 연장 논의도 빨리 시작되길 바라고 있다. 신씨는 “100세 인생이라고 하는데, 60세에 퇴직하면 40년이 남는다”며 “60세는 퇴사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라고 덧붙였다.
“이대로는 힘들어서 못 버텨요”
모든 청년이 정년 이후까지 일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다. 빠른 퇴사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경제적 자립에 성공해 일찍 은퇴하는 파이어족(FIRE :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과 조기 은퇴(Retire Early)의 앞 글자를 딴 단어)에 대한 관심도 많다. 2019년 발간된 책 ‘파이어족이 온다’에 따르면, 파이어족은 지난 1990년대 미국에 처음 등장해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확산된 개념이다. 저성장 시대에 노동강도가 높은 직장에 대한 부담과 준비 없이 은퇴한 부모 세대의 어려움을 지켜본 청년들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 IT 기업에서 5년째 근무 중인 민모(30)씨는 오는 2030년에 퇴사하는 것이 목표다. 은퇴 이후 매달 필요한 생활비와 모아야 하는 총 자금, 재테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대 수익까지 계산한 결과다. 잦은 야근과 조직문화에 지쳤다는 민씨는 “회사를 그만둔 후 놀고만 싶진 않다”며 “회사에 목매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적 자유를 확보한 다음, 진짜 하고 싶은 걸 찾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라고 전했다.
서울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하는 5년차 공무원 윤모(30)씨에겐 정년이 따로 없다. 짧은 기간 동안 바짝 벌고 퇴사해 남들처럼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것이 목표다. 소소하게 적금과 재테크를 병행하며 퇴사 이후 어떤 삶을 살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 윤씨는 “업무 때문에 연차를 다 못 쓰는 것은 기본이고 원하는 날에 쓸 수도 없다”며 “한 번 사는 인생,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다.
“꿈보다 안정감이 소중해요”
회사가 주는 소속감과 안정감도 계속 일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다. ‘2023년 5월 고령층 부가조사’에서 고령층이 계속 일하고 싶은 이유 중 일하는 즐거움(35.6%)이 생활비(55.8%) 다음으로 컸다. 서울 공덕동에 거주 중인 이모(29)씨는 퇴직한 부모님을 보며 법적 정년이 짧다고 생각했다. 이씨는 “부모님이 정년퇴직 이후에 1년 정도 여행만 다니셨는데, 이후에 심심하신지 계속 일을 하고 싶어 하셨다”며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성취감과 사회 속에 있다는 안정감이 중요하다”고 했다.
4년차 직장인 정모(27)씨도 지난해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했다. 회사가 시키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6개월 동안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했지만, 결국 퇴사하지 않기로 했다. 꿈을 이루는 것보다 안정적인 월급이 더 소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불확실성이 큰 시기라 고민 끝에 마음을 다 잡았다”며 “이제 목표는 정년까지 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돈을 떠나 일 자체가 주는 의미가 있다는 청년들도 있다. 직장인 배모(29)씨는 “일은 단순 돈벌이를 넘어 그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이자 그 사람 자체”라고 정의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오랫동안 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정년을 꽉 채워서 일하고 싶다는 얘기다. 배씨는 “경제적 자유를 갖추지 않는 이상, 놀 바엔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고 일하는 것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더 생산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년 연장이든, 조기 퇴사든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찾는 과정이라 봐줬으면 해요.” (은행원 이모씨)
유민지 기자 mj@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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