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간 계좌 30개 만들어 수십 명에 중고 거래 사기
사기이력 조회망에도 안 걸려
무한대로 개설할 수 있는 자유적립식 적금 계좌와 '계좌 번호 변경 서비스'를 악용해 수십 명에게 중고 거래 사기를 친 신종 수법이 등장해 주의가 요망된다.
12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경기도 광주에 사는 30대 김모 씨는 지난 1일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아이폰을 판매한다는 게시글을 발견했다. 김 씨는 전남 목포에 거주한다는 판매자 이 모 씨와 택배 거래를 하기로 하고, 먼저 사기 거래 이력 조회 서비스인 '더치트'를 통해 이 씨의 전화번호와 계좌번호를 조회했다.
김 씨는 이 씨의 연락처와 계좌가 사기로 신고된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후 이 씨의 주민등록증 사진까지 전송받아 확인 후 안심하고 거래를 진행했다. 그는 이 씨로부터 택배 송장 사진을 전송받은 다음 물건값 96만원을 이 씨의 계좌로 입금했다. 그러나 이후 이 씨는 연락을 끊었고, 택배로 보냈다는 물건도 받지 못했다.
김 씨와 같이 이 씨와 중고 거래를 하려다 사기를 당하고 단체채팅방에 모인 피해자들은 모두 37명, 피해 금액은 3200만원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거래에 앞서 사기 이력 조회 사이트인 '더치트'에서 이 씨의 계좌번호를 조회해 사기로 신고된 적이 없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이는 무용지물이었다. 이 씨는 중고 거래에 개수 제한 없이 무한대로 개설할 수 있는 자유적립식 적금 계좌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유적립식 적금 계좌는 신규 개설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 한 사람이 한 은행에 하루에도 수십 개의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또 말 그대로 자유적립식이라 지정된 날짜가 아니라 예금주가 원하면 아무 때나 입금할 수 있기 때문에 계좌로 다른 사람이 입금할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일반 입출금 통장은 금융 사기에 이용되는 것을 막고자 일정 기간이 지나야 신규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이 씨는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3일까지 나흘 동안 A 은행에 자신의 명의로 최소 31개의 적금 계좌를 개설해 중고 거래 사기에 이용했다. 그는 사기를 칠 때마다 새 계좌를 만드는 수법으로 사기 이력 조회를 피했다.
또 이 씨는 일반 입출금 계좌도 중고 거래 사기에 이용했다. 그가 일반 입출금 계좌를 사용하면서도 사기 이력 조회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계좌번호 변경 서비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계좌번호 변경 서비스'는 예금주 마음대로 계좌번호를 바꿀 수 있는 서비스로, 본래의 목적은 은행 계좌번호를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 등 예금주가 원하는(외우기 쉬운) 숫자로 바꿔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기간과 횟수에 제한 없이 계좌번호를 손쉽게 바꿀 수 있다 보니 금융 사기 범죄에 악용되기도 한다. 이 씨는 A 은행에 개설된 자신 명의의 입출금 계좌 1개의 번호를 계속 바꿔 최소 5명에게 사기를 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계좌번호가 '더치트'에 등록되면 계좌번호를 바꾸는 수법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A 은행 측은 연합뉴스에 "고객 편의를 위해 만든 서비스가 당초 취지와 달리 사기에 악용되는 상황이 됐다"면서 "계좌번호를 변경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을 두는 등 서비스를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또 자유적립식 적금 계좌의 허점에 대해 "당국과 은행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개선 방안을 모색했으나 중고 거래 사기는 보이스피싱과 달리 법적 근거가 없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면서 "중고 거래와 같은 물품 사기도 전기금융통신사기피해방지법상 전기금융통신사기 범주에 포함하는 법 개정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고 거래, 계좌 지급정지 요청 어려워중고 거래 등 물품 거래를 가장한 사기는 전기금융통신사기피해환급법의 규제 대상이 아니어서 계좌 지급정지를 요청할 법적 근거가 없다. 반면 보이스피싱의 경우, 사기에 이용된 계좌로 의심되면 금융기관이 경찰 요청 없이 피해자의 신고에 따라 해당 계좌에 대해 즉시 지급정지 조치를 할 수 있다.
'물품 거래를 가장한 행위'도 전기금융통신사기피해환급법 규제 대상에 포함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됐지만 통과되지는 못했다.
김현정 기자 khj2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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