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 탓에 유명해진 이 도시, 제대로 보면 놀랄 걸요 [우리 도시 에세이]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봄이면 황홀경이 펼쳐지곤 했다. 연분홍 복사꽃이 흐드러지면, 유원지이던 이곳으로 유람객이 몰려들었다. 지금의 부천역 남쪽 성주산엔 야생 복숭아나무가 많았다. 인천역 역장이던 일본인이 이를 개량하여 1903년 재배하기 시작하고, 1925년을 즈음하여 이곳 복숭아가 전국에 이름을 떨친다.
▲ 부천역 남부광장 소사 복숭아의 시직이 역 남부광장 맞은 편에 자리한 성주산 자락에서 시작되었다. |
ⓒ 이영천 |
이곳에서 부천이 태어났다. 초기 도시화가 소사역(현 부천역) 중심으로 형성되면서부터다. 경인고속도로와 함께 경인공업지대가 생기자, 서울을 빠져나온 인구가 몰려들어 점차 도시가 확산한다. 200만 호 주택건설 때 등장한 신도시는 새로운 활력이었다. 금방이라도 100만 인구에 다다를 듯 보였다. 하지만 도시는 정체되었고, 이제 쇠락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 내몰렸다.
▲ 1960년대 소사역(현 부천역) 소사역(현 부천역) 북부광장으로 추정되는 곳의 1960년대 모습. |
ⓒ 부천시청 |
쌀 수탈할 목적으로 세워졌던 역
▲ 소사역(현 부천역) 주변(1960년대) 성주산 쪽에서 바라 본 1960년대 부천의 모습. 역 주변으로 형성된 초기 도시화의 모습과 너른 부평평야 모습이 공존한다. |
ⓒ 부천시청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인천 개항장을 제외한 넓은 지역으로 부천군이 탄생한다. 부평과 인천에서 각각 '부(富)와 천(川)'을 따와 이름을 짓는다. 이중 소사면이 1941년 읍(邑)으로 승격한다.
그 후 여러 차례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인천과 김포·시흥에 많은 지역을 넘겨주고, 소사와 오정만 남는다. 1973년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하고, 1975년 오정면이 편입되어 현재 부천시를 이룬다. 다른 도시에서 가져온 음절이, 그곳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름만으로 남은 셈이다.
부천은 크게 두 곳의 생활권으로 나눌 수 있다. 원미산과 성주산을 잇는 언덕이 그 경계를 가른다. 옛 부평평야를 차지한 원도심과 신도시가 하나고, 역곡역 중심의 생활권이 또 다른 하나다.
연결돼 분포하는 도시들
하나의 도시가 성장하면서 여러 도시가 줄지어 잇닿은 상태를 일컫는 용어가 연담도시화(聯擔都市化)다. 경인 축과 경부 축을 따라 늘어선 도시들이 대표적이다.
▲ 역 주변 로데오 거리 부천역 북부광장 북서쪽에 형성된 로데오거리 중 일부. '상상의 거리'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갖고 있다. |
ⓒ 이영천 |
1960∼1970년대 급격한 공업화는 경제와 산업 발달의 밑거름이었으나, 반대로 수많은 도시문제도 불러일으켰다. 이의 해결책으로 산업시설을 외곽으로 분산시키고자 생겨난 게 소위 '경인공업지대'다. 영등포·구로 지역에 1∼3공단, 부평·주안에 4∼6공단이 들어서면서부터다. 경인선과 1968년 개통한 경인고속도로가 주 인프라였다.
부천 공업단지도 이때 생겨난다. 현 소사역 남쪽과 경인고속도로 부천 나들목 주변이다. 해마다 반복되던 굴포천 홍수를 피해, 원미산 자락 구릉지를 공장이 차지한다. 교통과 산업시설로 촉발된 연담도시 축을 따라, 영등포·구로∼부평·주안을 보완하는 산업기능이 주로 부천에 들어섰다.
▲ 경인국도(1960) 경인선 철도 남쪽에서 서울~인천을 잇는 경인국도(현 경인로) 중 1960년 부천 구간의 모습. |
ⓒ 부천시청 |
이런 사유로 부천을 베드타운이라 하기엔 어색한 측면이 있다. 신도시를 제외하면, 자족 기능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재래 산업이 중심이라, 첨단산업으로 변모할 바탕도 충분한 셈이다. 경인 축 연담도시 중, 특색있는 생산기능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게 진정한 연담도시화 실현이다.
인구 감소하는 수도권 대도시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극심한 저출산에 지역 성장 동력이 소멸하면서 존립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농어촌의 심각성은 결코 내버려 둘 상황이 아니다.
▲ 남부광장 옆 시장 부천역 남부광장에 잇닿아 있는 시장의 모습. 북부광장 주변에 비해 도시활동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
ⓒ 이영천 |
원인은 여러 가지다. 높은 인구밀도에 원도심 노후화가 첫째다. 낡은 생활환경이 인천·시흥·김포 등 인근 신개발지로 이주를 촉발한다. 2021년 기준 인구밀도는 ㎢당 1만 5768명으로 경기도 1위다. 2위 수원의 1만 91명보다 5천여 명이 더 밀집해 있다.
높은 인구밀도는 필연적으로 교통과 에너지 등 도시문제를 유발한다. 이의 가장 확실한 해결책을 과감한 인프라 공급에서 찾아야 한다. 에너지와 상하수도 공급능력을 높여주고, 노후 가옥 매입을 통해 용도 전환이나 소규모 공원 조성 등, 가옥 밀집도를 낮춰야 한다. 원도심 내 공원녹지 비율을 높여가는 노력도 지속해야 한다.
▲ 소사 삼거리(1990) 지금의 부천역과 소사역 사이에 있는 소사 삼거리의 1990년 모습. 옛 경인로 도로 선형을 개량하면서 삼거리가 생겨났다. |
ⓒ 부천시청 |
결국 새로운 노동인구 유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재래 산업 틀을 민간기업 힘만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공급처리시설은 물론 양질의 노동력 공급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즉 공공부문의 몫이다. 최첨단산업 노동력의 유입은, 양질의 생활환경이 우선이다. 높은 지대(地代)도 걸림돌이다. 지방세 등 세제 지원을 통한 경감 방안을 살펴야 한다. 결국 원도심 활성화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부망천(離富亡川)
관용구로 인식되어 차별을 조장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도 없다. '서울 살다가 이혼하면 부천 가고 망하면 인천 간다'는, 보수 정당 한 국회의원이 했던 저 망언이 사자성어처럼 사람들 뇌리에 똬리 틀어 가고 있다. 이 말의 피해자인 두 도시 시민은 얼마나 억울할까. 모름지기 한 세대는 지나야 사라질 망언일지도 모른다.
▲ 부천역 북부광장 보행자 전용 공간으로 깔끔하게 단장된 북부광장과 부천역. |
ⓒ 이영천 |
도시 공간이 쌓아 온 시간과 역사, 문화가 짓밟혔다. 아니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삶이 깡그리 으스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평소 생각과 의식이 자연스럽게 알려진 계기였다. 그러함에도 그 정치 집단이 두 도시에서 다시 선택받는다. 역설이다. 굴욕을 애써 무시해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는 반발심리일까. 그도 아니면 저런 행위에 무감각하도록 길들여진 탓일까.
▲ 옛 시청 옛 시청 주변에서, 오후 5시 벌어지고 있는 국기하강식 모습. |
ⓒ 부천시청 |
이 망언 속엔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가 휘발되어 있다. 착실하게 일해 부를 쌓는 행위가 멸시의 대상이 된 사회이자 나라가 지금 우리 모습이다. 이런 비극이 강남개발에서 촉발된, 그것도 정부 권력에 의해 씨앗 뿌려진 '투기'에서 시작되었고, 궁극엔 이 망언에 잇닿아 있다. 온 국민의 꿈이 '투기꾼'인 세상이다. 이 망언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칠, 최대 죄악으로 자리매김해버렸다.
잃어버린 복사골의 꿈을 어디에서 다시 찾아야 할까. 만화와 영화가 중심인 문화도시를 꿈꾼다. 그러함에도 서울∼인천을 잇는 위성도시라는 한계는 버거워 보인다. 인구 규모는 준다 하더라도, 융성하는 문화의 힘을 자랑하는 도시를 지향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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