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갈치조림, 고구마순 듬뿍 넣고

노은주 2023. 8. 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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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에도 기억나는 음식은 애써 요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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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주 기자]

잠을 설쳤다. 더위 때문인지 아침이 되기도 전에 깨어난 정신이 주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 잠들 때 얼려두었던 몸이 녹아 송골송골 땀방울을 만든다. 남편 머리맡에 놓여있을 리모컨을 찾아 더듬거렸다. 손은 목표물을 쉽게도 찾는다. 전원버튼을 누르니 우웅 소리와 함께 방안의 침묵이 깨졌다. 에어컨 소리에 깬 건지, 잠꼬대라도 하는 것인지 남편이 중얼거린다.

"더워? 내가 켜려고 했는데."

요즘에는 되도록 덥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덥다는 말을 하는 순간 더위에게 지는 게 될 것 같아서다. 하지만 무의식은 이렇듯 잠시의 더위도 참아내지 못하고 리모컨을 찾고야 만다. 애써 청한 잠을 쫓아내고 의식의 목덜미를 잡으면서 말이다. 의문의 1패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우리들의 여름은 어땠을까? 그때는 지구가 지금보다 덥지 않아 견딜 만했을까? 아님 깨어남과 잠듦 사이를 오가며 현실마저 잠결처럼 몽롱한 상태로 보냈을까?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아 특별한 어려움 없이 잘 견뎌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어린 시절, 나의 여름은 지금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고 있었다는 거다. 

여름만 되면 생각나는 맛
 
 여름이면 고구마줄기가 나오고, 고구마줄기를 보면 갈치조림이 생각나고, 갈치조림을 먹으면 어린 시절 엄마의 갈치조림이 떠오른다.
ⓒ Wikimedia Commons 무료이미지
 
어렸을 적, 나의 새벽은 엄마의 아침이었다. 엄마는 아침이라 부르기엔 너무 이른 그 시간에 시장엘 가곤 하셨다. 그곳에서 아직 숨이 죽지 않아 빳빳하게 살아있는 채소와 비린내가 진하지 않은 생선을 사오시고는 내가 눈을 뜰 때쯤에는 완성된 음식을 내놓으셨다.

그때 만났던 엄마의 음식들. 그때의 음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많은 음식 중에는 며칠 전에 먹었던 갈치조림이 있다. 엄마의 갈치조림은 갈치보다 밑에 깔린 고구마줄기가 더 많아 갈치조림이라 부르기에 뭐 한 음식이었지만, 고구마줄기보다 갈치에 집중했던 나에게는 여전히 그 음식의 이름은 갈치조림이다. 

갈치조림을 먹을 때면 엄마는 메인인 갈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고구마줄기만 애정하셨다. 마치 그런 행위가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심하게 갈치를 먹었을 뿐이다. 넉넉하지 못한 양이었지만 참 맛있다는 느낌으로 뱃속을 채우면서.

그래서일까? 여름만 되면 엄마의 갈치조림이 자꾸 생각난다. 특히 고구마줄기를 볼 때는 여지없다. 이후 나의 갈치조림에는 언제나 고구마줄기가 함께 했다. 그런데 가족들의 식성이 나와 다른 건 문제가 되었다.

남편은 갈치조림에 감자 넣는 걸 좋아한다. 어머니는 무 넣는 걸 좋아하시고. 세 사람의 식성이 다르니 그 또한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큰 냄비다. 모든 재료를 넣어버릴 만큼 커다란 냄비.

무는 먼저 익히는 게 좋다. 다른 재료보다 푹 익혀야 맛이 나는데 익는 속도가 느리니 그런 것이다. 경험상 그렇다는 거다. 커다란 냄비에 무를 깔고 멸치육수를 부어 한소끔 끓인다. 그런 다음 나의 고구마줄기를 올리고, 고구마줄기 위에는 남편의 감자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갈치를 올리고 양념장을 뿌린다.

이제 뚜껑을 닫고 보글보글 끓여주기만 하면 끝이다. 여름 반찬은 간을 좀 세게 하는 것이 좋다. 간이 세면 음식이 쉽게 상하지 않고, 땀으로 배출된 염분을 보충할 수 있어서다. 이 또한 경험으로 하는 말이다. 

엄마도 고구마줄기가 더 좋았을까
 
▲ 손질한 고구마줄기 나의 갈치조림에 꼭 들어가는 고구마줄기. 손수 벗깁니다.
ⓒ 노은주
 
음식이 식탁에 오르면 내 젓가락이 제일 먼저 가는 곳은 고구마줄기다. 짭짤한 고구마줄기를 밥 위에 올려 먹으면 그 옛날 엄마의 갈치조림이 입안을 감싸고 돈다. 고구마줄기를 먹는 엄마가 떠오른다.

난 고구마줄기가 맛있어 먹었을 뿐인데, 남편은 이런 나를 곡해한다. 내가 당신들을 생각해서 갈치를 안 먹는 줄 알고 갈치 한 토막을 내 접시에 올려주는 것이다. 난 갈치 따위엔 관심도 없는데... 웃음이 난다.

엄마가 갈치에는 손도 안 대고 고구마줄기만 드셨던 것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고구마줄기가 진심으로 맛있어 그랬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을 한다. 고구마줄기가 갈치만큼 맛이 있는 음식이라는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적어도 엄마가 자식들 때문에 맛 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었다는 슬픈 기억 같은 건 남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박준 시인은 과거가 된 시간은 점점 더 먼 과거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내가 있는 곳으로 거슬러 올라와 고개를 내민다고 했다. 여름이면 고구마줄기가 나오고, 고구마줄기를 보면 갈치조림이 생각나고, 갈치조림을 먹으면 어린 시절 엄마의 갈치조림이 떠오르는 것처럼.

과거는 그렇게 흘러흘러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랑살랑 거슬러 올라와 현재의 우리를 만나고 있었다. 여름날의 갈치조림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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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글은 다음 브런치와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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