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주인공이 21세기 SF영화에 나온다면?

김성호 2023. 8. 1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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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22]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김성호 기자]

문학용어로 변주라는 말이 있다. 좁게는 앞문장과 뒷문장, 앞문단과 뒷문단의 변형된 반복이며, 넓게는 한 작품의 변형된 반복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제작되는 인간을 감시하는 중앙정부를 다룬 SF물은 < 1984 >의 변주로 이해되며, 멸망한 세상 끝의 이야기를 다루는 온갖 아포칼립스 작품들은 그 효시로 꼽히는 소설 <최후의 인간>의 변주로 이야기되고는 하는 것이다.

변주는 때로는 큰 줄기를 받아들여 새로움을 창작하는 일이기도 하고, 본래의 이야기를 그대로 연상할 수 있도록 이끄는 부분적 재창작에 그치기도 한다. 원전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몇 가지 설정이며 시대적 특성을 더하는 오마주물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오늘 다룰 작품 또한 그와 같다고 하겠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포스터
ⓒ BBC
 
드라마와 고전소설의 절묘한 만남

<닥터 후> 다섯 번째 뉴 시즌이 종료된 뒤 나온 스페셜 회차는 특별히 문학적 가치를 주목받았다. 시리즈가 문학에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온 탓도 있겠으나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인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SF적으로 변주한 흥미로운 회차였기 때문일 것이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은 여느 때처럼 닥터(맷 스미스 분)가 동반자인 에이미(카렌 길런 분)와 로리(아서 다빌 분) 부부와 함께 시간여행 도중 맞이한 사건을 다룬다.

에이미와 로리는 시간여행 중 조난신호를 접수하고 신호를 보내온 어느 우주선에 올라탄다. 우주선은 기상이변 속에서 추락할 위험을 겪고 있는데, 착륙할 수 있는 행성에선 이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닥터는 추락을 막기 위하여 행성을 지배하는 남자 카즈란 사딕(대니 혼 분)을 찾아간다.

카즈란은 아버지가 개발한 기계를 통해 행성을 장악한 지배자다. 본래 이 행성엔 대기를 떠다니는 물고기가 가득했는데, 이들 물고기 중에선 인간을 사냥해 먹고 사는 녀석들이 제법 있어 사람들은 늘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던 중 카즈란의 아버지가 물고기를 다스리는 기계를 발명했고, 사람들의 피해가 더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스틸컷
ⓒ BBC
 
21세기 SF물이 변주한 스크루지 영감

문제는 사딕 부자가 그리 좋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기계를 오로지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한다.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모두가 사딕 부자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4000명이 넘는 승객이 탄 우주선에 위기가 닥치고 카즈란은 대통령의 부탁까지 묵살하며 이를 돕지 않기로 결정한다.

하루 이틀 다져진 몹쓸 성격이 아니다. 닥터 또한 카즈란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우주선은 더욱 큰 위기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고 물러나면 닥터가 아니다. 닥터에겐 특별한 무기가 하나 있고, 그 무기는 시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언제든 통하는 법이다. 그는 카즈란의 어린시절로 나아가 그의 역사를 바꾸어나가려 시도한다.

이야기는 심술궂은 늙은 지배자와 그의 성품을 바꾸어내려는 한 낯선 이의 이야기다. 또 카즈란의 과거 속에서 마주한 그가 사랑했던 여인과 또 그가 오늘의 괴팍한 노인네가 되어가게 된 이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궁극에는 카즈란이 제 마음을 돌려 사람들을 구하려 노력하게 되기까지, 요컨대 결코 변하지 않을 듯했던 한 인간이 변화하기까지의 이야기인 것이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스틸컷
ⓒ BBC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

이 놀라운 하룻밤의 이야기는 일찍이 디킨스가 써내려간 판타지 동화 <크리스마스 캐럴>을 여러모로 연상시킨다. 몇 년 전 죽은 동업자의 귀신을 만나 제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되는 괴팍한 노인네 스크루지의 이야기로부터 디킨스가 진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건 다름 아닌 변화, 또 가능성이었다. 거지조차 구걸하려 들지 않는, 맹인 안내견조차 그를 보면 먼 길을 돌아가려 할 만큼 인색하고 완고한 인간이었던 노인이 단 하룻밤에 변화할 수 있음을 더없이 궁색한 처지였던 디킨스가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선택이 권선징악적 주제에 그치는 흔한 동화들과 구분되는 생명력을 소설 안에 심어내었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은 시간의 세례를 건너 꾸준히 선택받는 이 드라마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다. 스페셜 회차로 독립돼 제작될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고, 변주의 대상이 된 고전의 여전한 가치를 입증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방송국 BBC는 바로 이렇게 제 나라가 자랑하는 문학을 그들이 가진 문화의 힘으로 되살려내는데 성공했다. 나는 바로 이것이 영국이 오늘날 손꼽는 문화강국인 이유이자 그들이 행해온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유라고 믿는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스틸컷
ⓒ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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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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