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주인공이 21세기 SF영화에 나온다면?
[김성호 기자]
문학용어로 변주라는 말이 있다. 좁게는 앞문장과 뒷문장, 앞문단과 뒷문단의 변형된 반복이며, 넓게는 한 작품의 변형된 반복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제작되는 인간을 감시하는 중앙정부를 다룬 SF물은 < 1984 >의 변주로 이해되며, 멸망한 세상 끝의 이야기를 다루는 온갖 아포칼립스 작품들은 그 효시로 꼽히는 소설 <최후의 인간>의 변주로 이야기되고는 하는 것이다.
▲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포스터 |
ⓒ BBC |
드라마와 고전소설의 절묘한 만남
<닥터 후> 다섯 번째 뉴 시즌이 종료된 뒤 나온 스페셜 회차는 특별히 문학적 가치를 주목받았다. 시리즈가 문학에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온 탓도 있겠으나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인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SF적으로 변주한 흥미로운 회차였기 때문일 것이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은 여느 때처럼 닥터(맷 스미스 분)가 동반자인 에이미(카렌 길런 분)와 로리(아서 다빌 분) 부부와 함께 시간여행 도중 맞이한 사건을 다룬다.
에이미와 로리는 시간여행 중 조난신호를 접수하고 신호를 보내온 어느 우주선에 올라탄다. 우주선은 기상이변 속에서 추락할 위험을 겪고 있는데, 착륙할 수 있는 행성에선 이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닥터는 추락을 막기 위하여 행성을 지배하는 남자 카즈란 사딕(대니 혼 분)을 찾아간다.
▲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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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SF물이 변주한 스크루지 영감
문제는 사딕 부자가 그리 좋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기계를 오로지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한다.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모두가 사딕 부자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4000명이 넘는 승객이 탄 우주선에 위기가 닥치고 카즈란은 대통령의 부탁까지 묵살하며 이를 돕지 않기로 결정한다.
하루 이틀 다져진 몹쓸 성격이 아니다. 닥터 또한 카즈란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우주선은 더욱 큰 위기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고 물러나면 닥터가 아니다. 닥터에겐 특별한 무기가 하나 있고, 그 무기는 시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언제든 통하는 법이다. 그는 카즈란의 어린시절로 나아가 그의 역사를 바꾸어나가려 시도한다.
▲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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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
이 놀라운 하룻밤의 이야기는 일찍이 디킨스가 써내려간 판타지 동화 <크리스마스 캐럴>을 여러모로 연상시킨다. 몇 년 전 죽은 동업자의 귀신을 만나 제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되는 괴팍한 노인네 스크루지의 이야기로부터 디킨스가 진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건 다름 아닌 변화, 또 가능성이었다. 거지조차 구걸하려 들지 않는, 맹인 안내견조차 그를 보면 먼 길을 돌아가려 할 만큼 인색하고 완고한 인간이었던 노인이 단 하룻밤에 변화할 수 있음을 더없이 궁색한 처지였던 디킨스가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선택이 권선징악적 주제에 그치는 흔한 동화들과 구분되는 생명력을 소설 안에 심어내었다.
▲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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